[단비발언대]다극화하는 세계에 걱정스런 미국 ‘올인’ 외교

▲ 곽영신 기자
‘영장류 최강의 사나이’, ‘60억 분의 1’로 불리는 링의 지배자. 격투기 선수 예멜리야넨코 효도르(33, 러시아)를 수식해온 말이다. 그는 데뷔 이후 10년 간 단 한 차례도 경기에서 진 적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지난 6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종합격투기 ‘스트라이크포스’ 대회에서 파브리시오 베우둠이라는 브라질 선수에게 무릎을 꿇었다. 격투기 팬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예상 밖 결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난 10년간 격투 링은 효도르의 독무대였다. 전 세계 내로라하는 ‘파이터’들이 줄줄이 그 앞에서 무너졌다. 효도르의 경기를 보는 것은 그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하는 의례처럼 느껴졌다. 그랬던 그가 순간의 방심으로 ‘삼각조르기’ 기술에 걸려 1라운드에 링을 내려갔던 것이다. ‘황제의 몰락’에 많은 이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베팅’했다가 망한 도박사들도 많았을 것이다. 반면 링의 지배자를 꺾은 베우둠은 새로운 스타로 급부상했다.

미국이 대대적으로 이란을 압박하고 있다. 그 이유가 ‘핵’ 때문이든 ‘석유 헤게모니’ 때문이든 국제외교 링의 최강자 미국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에 ‘베팅’한 일본, 유럽이 이란 제재에 동참했다. 그리고 미국이 링에 오를 때마다 그편에 ‘올인’해왔던 한국도 이란 제재 방안을 발표했다.

한국의 제재안은 이란이 중동지역 외에 유일하게 점포를 낸 멜라트 은행의 서울지점을 영업정지시키고 각종 금융제재를 가하는 등 미국의 입맛을 상당히 맞춘 것이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보다 수위를 높인 것인데, 한미동맹 관계를 고려하면 이해할 만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 제재가 한국 경제의 앞날에 드리울 그늘이 만만치 않다. 이란과 거래해 온 수천 개 중소기업의 수출이 일부 중단되거나 전면 취소됐고, 대기업들이 수주 예정이었던 중대형 사업들도 엎어졌다. 한국 드라마 ‘대장금’에 환호하고, LG 가전제품을 최고의 혼수로 꼽아 온 이란 국민들은 섭섭한 마음을 안고 한국에 등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우리 기업들이 이 지역에서 건설프로젝트를 새로 수주하거나 소비재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아가 이란과 이란에 우호적인 다른 중동국가 시장을 영구히 잃을 위험도 없지 않다. 이미 중국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이란 시장에 진입해 한국 기업들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본이나 유럽과 달리 이란과 상대적 교역규모가 큰 우리나라가 제 살을 깎아가며  미국 요구를 들어준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물론 정부도 한미동맹과 경제적 실익 사이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 즉 미국의 일방적 독주가 끝난 뒤 세계에 대한 성찰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올 상반기에 공식적으로 ‘경제 규모 세계 2위’를 달성한 중국은 외교, 군사적으로도 ‘슈퍼 파워’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중동과 남미 등에서는 노골적으로 반미를 표방하는 나라들이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반면 서브프라임 위기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는 ‘달러의 몰락’ 등 우울한 미래가 거론되고 있다. 앞으로 세계는 미국 독주 에서 벗어나 중국과 유럽 등이 힘을 겨루는 다극시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눈치를 살핀 정부의 결정이 ‘효도르의 침몰’을 예견하지 못한 도박사의 ‘올인’이 아닌지 걱정된다. 정부가 제재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우리와 이란의 특수한 경제적 관계를 설명하고 미국의 이해를 구할 수는 없었는지, 이란 정부와 물밑 대화를 통해 차후 관계 회복의 포석을 깔아두는 노력은 했는지 궁금하다. 외교의 목적은 결국 ‘국리민복(國利民福)’이라는데 말이다.

격투 링에서 새로운 스타들이 끊임없이 명멸하듯, 국제무대의 어떤 강자도 언젠가는 퇴장하게 될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영국이 미국에 자리를 내어 주었듯이. 베우둠에게 쫓겨 내려간 효도르의 모습에서 우리 정부가 필요한 교훈을 꼭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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