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의 클래식 톡톡] 가을의 음악, 탱고의 황제 피아졸라

예술고등학교 시절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딱 이 맘 때 음악감상 시간, 선생님은 가을에 어울리는 곡을 소개해 주겠다며 특이한 음색의 곡을 들려주었다. 흥겹지만 구슬픈 멜로디. 단 한 소절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그 음악은 다름 아닌 탱고였다.

탱고는 19세기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에서 탄생했다. 유럽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이 북적대는 항구도시는 가난과 우울, 시름으로 가득했다. 석양이 지고 나면 사람들은 밀롱가에 모여 탱고를 췄다. 애잔하면서도 선정적이고, 비극적이면서도 흥겨운 리듬을 간직한 탱고는 그래서 사람들을 유혹한다.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어원을 찾는 탱고는 ‘가까이 다가서다’ ‘만지다’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다’란 뜻을 가졌다.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은 비주류들은 그렇게 탱고를 통해 서로의 고된 육신과 마음을 달랬다.

 

▲ 서울 잠원동의 레스토랑겸 탱고 공연장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 댄서 커플이 격정적인 탱고를 선보이고 있다.  ⓒ제정임

그런 탱고를 감상 음악으로 발전시켜 세계에 알린 이가 바로 탱고의 전설이자 황제로 불리는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zolla, 1921~1992)이다. 그는 아코디온과 비슷한 반도네온 연주자이자 탱고 작곡가로서 자신만의 새로운 탱고 스타일, 곧 누에보 탱고(Nuevo Tango)의 시대를 열었다. ‘누에보 탱고’는 클래식 연주자들이 사랑하는 레퍼토리로, 전 세계 대중이 즐겨 듣는 음악으로 재탄생했다. 빈민들의 음악이라고 탱고를 천하게 여겼던 아르헨티나 상류층이, 파리나 빈 등지로 수출돼 인기를 얻은 탱고를 역수입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이 모든 것이 피아졸라의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피아졸라 ⓒwww.piazzolla.org

이런 그에게도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반도네온을 비롯해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지만 그에겐 늘 탱고를 연주한다는 열등감과 클래식 음악에 대한 동경이 공존했다. 그러던 중 파리 최고 음악교사였던 나디아 블랑제와 만나게 된다. 피아졸라의 회고담을 잠깐 요약한다.

"그 때까지 작곡해 놓은 엄청난 수의 소나타와 교향곡들을 겨드랑이에 끼고 나디아 선생에게 갔습니다. 선생은 내 악보들을 꼼꼼히 훑어보더니,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평하더군요. '잘 했군. 그런데 여기는 스트라빈스키 같고, 여기는 바르톡, 또 저기는 라벨...... 아무데도 피아졸라는 없잖아. 안 그래?' 다음에는 사생활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는데, 너무 창피해 끝까지 숨기려다가 결국 캬바레에서 반도네온으로 탱고를 연주했다는 말을 흘릴 수밖에 없었죠. 뜻밖에 탱고를 연주해보라는 거였어요. 내가 몇 소절을 연주하자 선생은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내 손을 잡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유 이 멍청이, 진작 얘기하지! 이게 바로 피아졸라잖아!' 그 순간 10년간 작곡한 악보들은 몽땅 버려진 겁니다."

그녀와 만난 뒤 피아졸라는 ‘쓰레기’라 생각했던 탱고에 자유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열등감을 벗어 던지고 한껏 자유로워진 그의 탱고를 들은 나디아 선생은 피아졸라에게 ‘네가 내 제자인 것이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피아졸라 표 ‘누에보 탱고’는 1970년대 이후 유럽은 물론 뉴욕, 도쿄 등에서도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계 역시 그의 탱고에 주목했다. 특히 1992년 크로노스 4중주단이 발표한 피아졸라 작품집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피아졸라와 탱고를 사랑한 대가들의 음반도 발표됐다. 첼리스트 요요마,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등의 탱고 연주는 클래식 악기와 기법이 탱고와 만나 색다른 감동을 안긴다. 꾸준히 대중에게 사랑받는 연주들이다.

우리나라에도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연주자들이 많다. 지금도 앙상블, 독주, 협주 등 다양한 형태로 그의 음악이 꾸준히 연주되고 있고, 첼리스트 송영훈은 피아졸라를 위한 헌정 앨범도 제작하며 탱고 음악 전도사로 나섰다. 얼마 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종영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도 ‘리베르 탱고’가 연주되며 관심을 끌었다.

 

▲ 공연을 마친 탱고댄서들이 정중히 인사하고 있다 ⓒ제정임

탱고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확립한 피아졸라는 1992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그의 반도네온 소리는 가을과 참 잘 어울린다. 처연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탱고의 애상은 우리의 고단한 일상을 위로한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는 낯선 여인에게 탱고를 제안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탱고에 실수란 없어요. 스텝이 엉키면 엉킨 대로 다시 추면 돼요, 그게 바로 탱고지요.”

마치, 우리의 삶에 건네는 속삭임 같다.  


탱고 음악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기사에 소개된 '리베르 탱고'와 피아졸라의 또 다른 대표곡 '망각' 연주를 링크해 둡니다.^^

<리베르 탱고>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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