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우수 김수진

“한 번 더! 한 번 더!”

롤러코스터를 탄 승객들의 외침에 담당자는 놀이기구를 한 번 더 작동한다. 노래방 주인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손님을 위해 한 번 더 추가시간을 준다. 시장통에서 콩나물 파는 할머니는 아줌마 손님의 극성에 못이기는 척 콩나물 한 줌을 더 비닐봉지에 눌러 담는다. 한국 사람들은 덤을 좋아한다. 덤은 수치화한 척도와 경계를 거부한다. 특히 정서적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덤은 ‘정(情)의 표시’, 곧 정표로 인식된다. 수치화한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눈 감아주고, 참는 데 익숙한 한국 사람들이다.

인류는 근대로 접어들며, 정이나 낭만보다는 객관적 이성을 중시했다. 애매모호했던 영토에 명백하게 국경선을 그었고, 생활을 규제하는 시간을 만들고, 모든 사물을 객관화하기 위해 계량화 작업을 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이러한 작업은 외부세력에 의해 시작됐다. 일본은 자기네 필요에 맞춰 조선의 근대화를 주도했다. 일제는 강압적인 군국주의 통치로 근대를 살아갈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조선인들을 근대적 인간으로 재탄생하도록 강제했다. 해방 뒤 진행된 산업화조차 자발적이었다기보다, 독재정권이 권위주의적으로 밀어부친 결과였다. 한국인들은 강력한 힘에 의해 근대적 인간으로 ‘조각’됐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온전한 근대인으로 재탄생하지 못했다. 도시와 의식주 등 가시적인 것들과 제도는 근대의 모습을 갖춘 듯하지만, 그것은 내면화하지 못한 외형적인 변화에 치우쳤고, 이성적 근대문화의 규범이 일상생활 전반에 스며들지 못했다. 일상 생활에서도 철저히 합리성을 추구하는 서구인들이 한국의 ‘덤 문화’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를 말하는 시점에서 한국인들이 온존하고 있는 중세적 특성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규정할 수 있겠다. 문제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공적 영역에서도 은밀히, 때로는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합리’가 필요한 곳에 ‘의리’가 등장한다. 정치는 ‘이성’ 아닌 ‘감정’에 호소하여 영향력을 발휘한다. 최근 불거진 ‘스폰서 검사’ ‘교육감•고위공무원 비리’사건들이 우리 사회의 이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탈근대 시대에는 모든 영역에서 점차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컴퓨터와 휴대폰,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의 경계까지 모호해지고 있다. 정해진 수치를 들이대지 않는 한국의 ‘덤문화’가 위상을 떨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 이성은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이성과 감성의 경계가 무너지고 조화를 이루려면, 이성과 합리성 또한 제 자리에 건재해야 할 테니까. 특히 힘있는 사람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끼리끼리 모여 ‘한잔 더’를 외치기 전에, ‘한 번 더’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고 이성을 회복해야 우리 사회 전체가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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