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대통령 퇴진 이끈 두 기자 이야기, '대통령의 사람들'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 부적절한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지난 5월 9일 보직사퇴 기자회견 자리에서 길환영 KBS 사장을 겨냥해 내뱉은 말이다. 김 전 국장은 KBS 사장이 언론에 대한 가치관과 식견도 없이 권력의 눈치만 보며 사사건건 보도의 독립성을 침해해 왔다고 폭로했다. 김 전 국장은 세월호 희생자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비교하는 취지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길 사장은 KBS를 항의 방문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외면했다.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으로 가서 농성을 벌이자 길 사장은 그 때서야 현장으로 달려가 사과를 했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김 전 국장의 발언을 보고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이 떠올랐다. 이 영화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 스캔들 중 하나로 꼽히는 ’워터게이트 사건‘ 실화를 다뤘다. 두 탐사 기자가 절도사건을 추적하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불법적인 재선 공작을 밝혀내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영화 제목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부의 추악한 군상들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두 기자가 ’대통령의 사람들‘의 음모를 밝혀내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권력을 감시해야 할 최대 공영방송사의 사장이 오히려 ’대통령의 사람‘이 돼 버렸다. 언론이 권력의 ’감시견‘에서 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지금, 찬란했던 ’저널리즘의 승리‘를 반추해 보는 것은 여러모로 복잡하다.    

▲ 미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사임을 불러온 정치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을 실화로 한 영화 <대통령의 사람들>. ⓒ 공식 누리집

"Follow the money!"

돈을 쫓아라! 딥 스로트(deep throat)가 남긴 조언은 간단명료했다. '왜 빌딩에 잠입한 도둑들에게 개인 자문 변호사가 있는지', '왜 그들의 소지품에 ‘W.H.(백악관을 의미)’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 '왜 대통령 재선본부 자금 2만 5천 달러가 그 도둑들에게 갔는지'. 단순한 절도 사건이 아니라는 기자의 직감과 끝을 보고 말겠다는 근성은 마침내 권력의 추악한 민낯을 들춰내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역 대통령의 사임을 불렀다. ‘워터게이트’ 사건 추적 보도는 <워싱턴 포스트>의 두 기자,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에게 퓰리처상과 미국 민주주의의 파수꾼이란 칭호를 안겼다. 

진실은 쉽게 오진 않는다. 1972년 6월, 당시 공화당 현직 대통령이던 닉슨의 재선을 노린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건물에 입주해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 건물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됐다. 처음에 이 사건은 경찰서에 접수된 단순 절도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의 신출내기 기자 밥 우드워드(로버트 레드포드)와 칼 번스타인(더스틴 호프만)은 사건의 배후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괴한 5명에 대한 보석심리를 놓치지 않았고, 이들 중 1명이 보안전문가이고 CIA에 근무한 사실을 확인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다음날 1면 머리기사로 이 사실을 보도했다. 다른 매체들은 대부분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을 때였다. 이날부터 2년 2개월 뒤인 1974년 4월 닉슨이 사임을 발표할 때까지 두 기자의 ‘워터게이트’ 추적 보도는 그야말로 탐사보도의 전형이었다.

▲ 약 2년 여의 취재를 거친 '워터게이트 스캔들' 폭로는 결국 배후의 권력을 밝히고 대통령의 사임을 끌어냈다. ⓒ <대통령의 사람들> 화면 갈무리

‘권력감시’ 탐사보도의 전형

단서 하나를 찾기 위해 무수히 많은 자료를 뒤져야 했고, 취재원의 한 마디를 듣기 위해 수많은 집의 문을 두드리고, 수백 통의 전화를 걸었다. 주말, 휴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씩 취재하는 게 보통이었다. 때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고, "언론의 자유가 아니고 남용"이라는 비난도 견뎌야 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세무조사와 광고 보이콧 위협에 시달렸다. 하지만 회사는 두 기자에게 흔들림 없이 취재하라며 이들을 격려했다. 

오늘날 우리 언론은 어떠한가. 권력을 견제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는 저널리즘의 기본 중에 기본이지만 지상파 방송을 비롯한 대다수 주류 매체들은 기본 책무를 버린 지 오래다. 방송의 공정성 확보를 위한 젊은 기자들의 목소리는 '정치적 행동'이라 매도되고, '사실'은 언론의 입맛에 맞춰 취사선택되고 있다. '진실'은 사라지고 '정파성‘과 ’상업성‘만 남은 언론에 국민은 더 이상 희망을 찾기 힘들게 됐다.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기자는 '기레기'로 불린다. 하지만 누가 ’기레기‘에게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사람들‘이 돼 버린 언론사 경영진과 데스크들이 사실은 ’기레기‘ 양산의 주범이다. 반면 ’우드스타인(Woodstein)’의 편집국장은 이들을 최고의 탐사저널리스트로 만들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 밴 브래들리(제이슨 로바즈)는 취재원의 진술 번복과 취재를 거듭할수록 심해지는 정치적 압박에 지쳐가는 두 기자에게 '추측이 아닌 분명한 사실'을 가져오라고 계속 다그친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이 밝히려고 하는 진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 일의 성패에 달린 건 다른 게 아니야. 수정헌법 제1조, 바로 언론의 자유지. 그리고 아마도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렸다고도 할 수 있겠지."

▲ 두 기자가 밝혀낼 진실을 믿고 격려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 밴 브래들리(제이슨 로바즈)와 최근 세월호사건과 관련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보직사퇴한 KBS 김시곤 보도국장. ⓒ 영화 공식누리집, KBS 뉴스화면 갈무리

오늘날 망가진 언론 상황에서도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기자들이 국민에게 사죄의 성명을 발표하고, 권력의 앞잡이가 된 간부들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슬프게도 우리 언론에 '밴 브래들리'는 없다. 예전 후배들의 강제 해직에 항의해 편집국장 자리를 버린 송건호 선생 같은 편집국장도 더 이상 볼 수 없다.

대신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 좋은 자리로 가기 위해 저널리즘을 짓밟고 후배를 협박하는 ‘대통령의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진실'을 밝히는 실마리가 된 ‘딥 스로트’의 한 마디 "돈을 쫓아라!(Follow the money!)"는 우리 언론계에서도 실행되고 있다. 다만 그 목적이 ‘진실’ 추구가 아니라 진짜 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기자의 합리적 의문은 권력을 향한 질문이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의 주권을 대변한다. 권력자를 불편하게 하는 저널리즘의 질문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케 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질문은 기자의 특권이자 의무이지만 연출된 기자회견에 동원되고, 권력 앞에 입 다문 한국 주류 언론에게 그 특권은 애초에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여름 타계한 전설의 백악관 출입기자 헬렌 토머스는 "기자가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고 말했다. 이미 대통령은 왕이 됐고, 기자는 '대통령의 사람들'이 돼버린 것은 아닌지, 40년 전 영화의 제목이 새롭게 다가오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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