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봉샘의 피투성이 백일장] 우수 박성열

“1이란 창조하고 활동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회단체의 심부에 위치한 자기 자신이며, 삶과 죽음 앞에 직면한 자신만의 고독이다.” 수학자 조르쥬 이프라가 <신비로운 수의 역사>에서 말한 대목이다. 그의 말처럼 ‘1’이라는 숫자는 모양새부터 서 있는 인간을 꼭 닮았다. 그 숫자는 두 발로 어머니 대지를 밟은 거뭇한 원시인마냥 완강하고도 팽팽하다. ‘1’은 저 홀로 완결되어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숫자를 나누면서 동시에 어떤 수로도 나눠지지 않는, 다분히 절대성을 지닌 숫자이다.

반대로 ‘2’라는 숫자는, ‘1’에 이어서 탄생할 때부터 이미 죄와 파멸이란 상징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한다. ‘1’이 고작 두 개 더해지면 ‘2’가 되는데, 각각의 상징적 질서는 그렇듯 가파르게 어긋나는 것이 흥미롭다. 이프라에 따르면, ‘2’라는 수는 대립과 분할, 적대관계, 갈등과 반목 등의 상징이며, 이 상징은 삶과 죽음,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이중적인 관념을 통해 드러난다. ‘2’라는 수는, 절대적인 숫자 ‘1’과 대비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중성과 상대성을 가리킨다

어쩌면 인간의 운명이란 ‘1’과 ‘2’의 두 상징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꼴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 줄다리기는, 조금은 처연하다. 두 상징 사이 두터운 단절이 한 인간의 내부에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1’의 고독함과 ‘2’의 관계성은 모두 기막히게 인간의 실존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논리학의 모순율이 적용될 턱이 없다. 인간은 철저하게 혼자이면서도, 절대로 혼자일 수 없는 존재다. (아, 태초에 아이러니가 있었을지니!) 모두들 가끔은 지독하게 외로울 터이며, 또 가끔은 지독하게 사람에 실망할 것이다. 그 수평운동은 기어코, 생애 내내 반복된다.

‘1’이 지닌 태고의 존엄한 고독을 내면에 간직하면서도, 아무런 주저와 회의 없이 용감하게 ‘2’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과 타인(그리고 세계) 사이의 불화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자유로운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살 수 있을까? 선대(先代)의 가장 위대하고 예민한 지성들이 한결같이 고민했던 질문들이다. 어떻게 보면 ‘1’과 ‘2’의 상징, 다시 말해 고독과 사귐, 닫힘과 열림, 자아와 세계 사이의 상징적•철학적 대결은, 지적(知的)으로 그토록 매혹적인 주제였을 게다. 그리고 그들의 치열한 질문들은 우리의 일상으로 스며들어와 속삭인다. “이봐, 고독하려면 제대로 고독해보라고. 아니면 네 주위의 사람들을 있는 힘껏 품든지 말이야.”

다만 기억할 것이 있다. 지극히 간단한 산수 원리, 즉 ‘1’이 있어야 ‘2’가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수 개념에선 ‘2’보다 ‘1’이 먼저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두 발로 서는 게 먼저다. 고독할 줄 모르는 인간의 관계는 가짜 관계이며, 우리가 주체적인 자기 자신으로 성숙할 것을 포기했을 때 숫자는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퍽 슬픈 일임에 틀림없으리라.
 


 * 게재순서: 상•하위 입상작 구분 없이 위쪽과 아래쪽에서 매일 한 편씩 번갈아 가며 싣습니다. 어쩔 수 없이 차등을 두기는 했으나, ‘1’을 주제로 하면서, 저마다 발상이 다른 글에 등수를 매긴다는 게 어쩐지 미안했다는 교수님 말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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