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람 밝은 달, 그곳에 산다] ➂ 벌랏마을의 공예가 이종국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충청북도, 깎아지른 산길을 왼편에 두고 대청호를 따라 백 굽이를 지나면 청원군 문의면 소전리 벌랏마을이 나온다. 마을버스가 하루 6번 오갈 뿐 그 흔한 슈퍼마켓 하나 없는 동네다. ‘파리도 길을 잃는다’는 이 벽지 마을에선 휴대전화도 불통이다.

▲ 외부로 통하는 출구라곤 오솔길 하나밖에 없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벌랏마을. 왼쪽 샘봉산 아래 한지 공동작업장이 있다. ⓒ 유순상

'벌판의 밭'이란 뜻을 가진 벌랏마을은 40여 년 전만 해도 70가구 4백 명 가량의 주민이 살았지만 젊은이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나면서 이제는 22가구 30여명만 남았다. 오전 10시가 돼야 해가 뜨고 오후 3시면 해가 지는 산동네에서 예전 아이들은 30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지만 요즘은 취학연령대의 아이들이 없다. 

네 시간 걸어야 학교에 도착하던 오지 마을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소로(小路)를 따라 학교에 갔지. 티벳인가 테레비 나온 것 보니까 우리 때 학교 다니던 것과 똑같드만. 여기서 새벽 6시에 출발해서 학교 도착하면 10시야. 매일 아침 마라톤을 했지. 그래서 첫 교시가 뭔지 몰랐어."

▲대청호가 생기기 전 벌랏마을과 대전을 이어주었던 금강 벌랏나루터에서 마을 역사를 설명하는 청년회장 김대연씨. ⓒ 유순상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청년회장 김대연(53)씨가 집집마다 ‘다섯에서 최고 열 넷까지’ 아이를 낳았던 40여년  전을 아득하게 회고했다. 김씨는 젊은 시절 도시로 나가 만화가로 일했지만 ‘무기를 그리면 잔인하다, 사랑 얘기를 쓰면 야하다고 사사건건 심의에서 트집을 잡는 바람에’ 20여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쩌다 멧돼지가 출몰하는 이 오지마을이 방송사의 관심을 끌면서 지난해 한국방송(KBS) 고향극장 <두 남자의 멧돼지 소탕작전> 주인공을 맡는 등 20여 편의 TV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벌랏마을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피란민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50년 한국전쟁 때도 피란민이 들어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전혀 겪지 않았다고 한다. ‘충청도의 동막골(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오지마을)’이라고 불릴 만큼 고립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81년 대전시와 청원군 사이에 대청댐이 생기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은 오솔길과 열두 개의 개울을 지난 뒤 지금은 일부 수장된 벌랏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야 대전으로 갈 수 있었다. 

▲ 하루걸러 들어오는 이동슈퍼가 마을의 유일한 상점이다. 이동슈퍼 아저씨는 백혈병을 앓는 아들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이곳까지 들어온다. ⓒ 유순상

지천으로 자라는 닥나무로 전통 한지 되살려 

인구가 줄면서 활력을 잃었던 벌랏마을을 되살린 것은 마을에 지천으로 자라는 닥나무였다. 마을 주민들은 20여년 전 이 닥나무를 가공해서 전승이 끊겼던 한지생산을 다시 시작했다. 2005년 농촌진흥청이 벌랏마을의 ‘한지 뜨기’와 ‘한지공예 체험장’을 높이 평가해 농촌 전통테마마을로 선정했다. 마을은 정부지원금으로 한지 공동작업장을 만들었다. 농진청은 또 2010년 벌랏마을을 ‘전국의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농촌마을 100선’에 꼽았다. 반딧불이와 가재를 쉽게 볼 수 있는 마을에서 주민들은 민박집을 운영하며 ‘산골생태체험’과 ‘밤하늘 별보기’를 위해 찾아오는 외지 손님들을 맞는다. 

▲ 벌랏마을 한지 공동작업장. 이곳에서 닥나무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기고 두드리는 작업을 한다. ⓒ 유순상

1973년 무렵까지 이 마을의 주요 생산품이었다가 한옥의 창호지와 장판지 수요 등이 줄면서 명맥이 끊겼던 한지를 90년대 후반 들어 되살린 데는 ‘평범한 부처’라는 뜻의 마불(麻佛)을 호로 쓰는 공예가 이종국(52)씨의 공이 컸다. 이씨는 충북 괴산군 출신으로 청주의 서원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도시에서 셋방살이하며 못 하나 박기도 어렵고 밤늦게 작업하기도 눈치 보였던 설움이 쌓여 그림을 접었다. 운영하던 입시미술학원을 4년 만에 닫고 1998년 36살의 나이에 벌랏마을로 들어왔다.

"택시 잡아타고 ‘이 지역에서 가장 오지로 가자’고 했더니 택시기사가 자신의 고향인 벌랏마을로 데려다 주었어요."

그는 한동안 벌랏마을의 폐가에서 약초를 캐먹으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한지를 떴던 어르신이 집 벽장에서 한지 한 다발을 꺼내 보여주었다. 자신이 땅에 묻힐 때 쓸 종이라는 설명과 함께. 은은한 색감의 한지를 보고 이씨는 큰 감명을 받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에 종이를 끼워 세상에 알리고, 한지 장판 위에서 살다 다시 종이에 덮여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게 우리 민족의 삶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당시 마을에는 한지를 뜰 수 있는 지장(紙匠·종이 뜨는 사람)이 단 두 명 남아있었는데, 이씨는 그들을 붙잡고 전통제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닥나무로 팽이를 치고 놀았어요. 목수였던 아버지가 밭둑에다 닥나무를 수확해 놓으면 종이 뜨는 사람이 수거해가요. 며칠 뒤 일 년 쓸 종이를 가져다준다고. 그런 인연이 없었으면 닥나무의 가치를 몰랐겠죠."

장신구와 장난감 등 닥나무 공예품도 다양하게 생산 

▲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의중학교 맞은편에 자리한 마불 갤러리. 이종국씨는 이곳에서 한지를 제작하면서 다양한 공예품들도 전시판매하고 있다. ⓒ 유순상
▲ 마불 갤러리에서는 한지공예 수업과 함께 매년 아이들 연 만들기 대회를 연다. ⓒ 유순상

이씨는 이승철 동덕여대 미술학과 교수가 쓴 <아름다운 종이 한지> 등 전문서적을 뒤졌고 어느 지방에 뛰어난 지장(紙匠)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직접 찾아가 비법을 배웠다. 공부를 할수록 햇빛과 가까운 한지의 따듯한 빛깔과 친환경성, 견고함 등에 매료됐다. 종이뿐만 아니라 닥나무라는 원형에 대한 관심도 키워나갔다. 불린 닥나무에 왕겨와 톱밥을 섞어 견고하고 우둘투둘한 종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 닥나무 육질을 이용해 머리핀과 쟁반, 어린이 장난감, 장신구 등 공예품도 만들었다. 지장들은 이종국의 작품에 대해 ‘한지에 자연을 담았다’고 평한다. 

이씨는 옛 것과 첨단의 융합에 관심이 많다. 아들 세대에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을 고민한다. 다양한 종이를 만들기 위해 도구 틀도 직접 개조했다. 물감은 밭에서 얻은 천연재료로 만들어 쓴다. 작업 과정은 크게 둘로 나눴다.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먹 작업은 벌랏마을에 들어가서 한다. 닥나무와 종이를 이용한 소품 제작은 청원군 문의면 문의중학교 앞에 만든 마불 갤러리에서 하고 있다. 연등과 부채, 촛대, 항아리 등 이씨가 만든 다양한 소품은 국내외에서 전시되거나 현대건축의 인테리어 소품 등으로 쓰이고 있다.  

▲ 이씨는 한지공장에서 땔감으로 버려지던 닥나무 껍질을 이용해 나무새와 닥나무 그릇, 차(茶)통, 촛대 등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있다. ⓒ 마불갤러리

세계가 주목하는 우리 종이, 사회적 관심 필요  

20여년에 걸친 이씨의 ‘한지 사랑’은 이제 국내외에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문화예술 명예강사 100인’에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이문열 작가 등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2010년 캐나다 벤쿠버 동계올림픽 초대작가전을 포함, 매해 두 차례 이상 해외에서 전시 초청을 받는다. 2011년 장영실의 날 기념 과학기술전국대회 전통문화부분 금상, 2006년 농촌진흥청 소품공예 디자인대전 대상 등 수상실적도 화려하다. 기술과 오락, 디자인분야의 세계적 비영리 강연회인 테드(TED) 출연을 계획 중이고 자서전 출간도 추진되고 있다. 

“UCLA(미국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의 학장 한 분이 내 작품을 샀는데, 자기 학생들이 이곳에 와 한지 제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느냐고 물더군요. 학생들을 보내 학점으로 인정받는 코스를 만들고 싶다고요.”

이씨는 9년 전 아들의 교육 때문에 벌랏마을에서 문의면 소재지로 나왔다. 작품 활동에 더 집중하기 위해 마불 갤러리에 직원 5명을 채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업장의 규모가 커지는 것만큼 부담도 는다고 말했다. 사회적 기업으로 가볼까 했지만 혼자서는 무리라고 느꼈다. 개인이 아닌 지역, 또는 기업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10% 정도 밖에 안 됐다고 봐요. 종이를 뜰 수 있는 환경 전체를 정비해야죠. 중국은 국가에서 종이를 관리해요. 우리나라는 표준화된 제지법이나 철학이 없죠. 숭례문 공사과정에서 계속 오차가 난 게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축적된 기술을 기록하고 관리해야하는데 안 했으니까.”

▲ 마불 이종국씨. 늘 두건을 쓰고 개량 한복을 입는데, 고운 한지를 스카프처럼 목에 두르고 있었다. ⓒ 유순상

1966년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 해체 공사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추정 제작연대 704년)이 나왔다. 금동 사리함에 비단으로 싼, 한지 두루마리였다. 1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버틸 만큼 종이의 강도는 최고였고 먹 번짐 현상도 우수했다. 광택도 일품이었다. 요즘 뜨는 광고 표제어를 빌리자면 한지는 ‘단언컨대, 완벽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이씨는 이런 한지를 잘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이들이 보는 교과서를 한지로 만들고 한지 전용 복사기도 만들어 팔았으면 좋겠어요. 학교에 입학하면 닥나무를 심고, 나중에 그걸로 종이를 만들어 졸업장을 주면 어떨까요. (세계가 알아주는) 우리 종이에 대해 지역사회와 기업들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리거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맑은 바람 밝은 달,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에는 유독 사연 많고 소신 있는 예술인과 공동체운동가들이 많이 모여들고 있다. <단비뉴스>는 이렇게 충북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문화인과 활동가들을 찾아 나섰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CJB청주방송 황상호 기자가 글을 쓰고 서양화가 유순상 씨가 사진기와 붓을 들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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