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 ‘분신’ 이남종씨 흔적을 찾아

지난해 12월31일 서울역 고가도로에서 한 남성이 분신을 시도했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는 끝내 숨졌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그가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이 발행하는 온라인 신문 <단비뉴스> 취재기자 3명이 한겨레 토요판과 함께 이남종씨가 남긴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 광주 북구 망월동 구묘역에 있는 이남종씨의 묘. 지난해 12월31일 서울역 고가도로 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종씨는 자신이 살던 광주에 묻혔다. '퇴진'이 쓰인 검은색 펼침막이 그의 봉분을 감싸고 있다. ⓒ 박채린

서울 중구 만리동과 회현동을 잇는 서울역 고가도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표정 없는 도로는 잿빛이었고, 그 위를 바삐 오가는 차량에는 열흘 전 기억이 실려 있지 않았다. 지난 10일 오후 3시, 8m 높이의 고가도로 아래를 오가는 시민들은 두툼한 외투를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영하 9도의 추운 날씨였다.

지난해 12월31일 오후 5시27분, 고 이남종씨는 전라도 광주에서 몰고 온 은색 스타렉스 렌터카를 서울역 고가도로 위에 세웠다. 1시 방향에 서울역이, 바로 밑 10차선 도로와 버스전용차로, 택시 승강장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는 가로 90㎝, 세로 690㎝ 펼침막을 다리 아래로 펼쳤다. 붉은 바탕에 쓰인 흰색 글씨는 선명했다. ‘박근혜 사퇴’ ‘특검 실시’. 그는 쇠사슬로 묶은 몸에 휘발유를 붓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 “시위로 곧 불이 날 것이니 교통을 통제해주십시오.”

노모가 방에 붙여 놓았던 박근혜 포스터

발밑에는 땔감으로도 쓰이는 벽돌 모양의 톱밥이 쌓여 있었다. 한 손에 라이터를 쥔 채 “박근혜 사퇴”를 외치던 남종씨는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져 오자 불을 댕겼다.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은 3분 만에 진화됐다. 하지만 이미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그는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다음날 오전 8시 끝내 숨졌다. 현장에 남아 있던 유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총칼 없이 이룬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한 쿠데타 정부입니다. (중략) 모든 두려움을 불태우겠습니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남종씨가 자신의 마지막을 미리 준비해왔다는 사실은 현장에서 발견된 유류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탔던 스타렉스 차량에는 다른 굵기의 쇠사슬 두 개, 벽돌 모양의 톱밥이 가득 담긴 상자,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재질의 케이블타이, 밧줄 등이 남아 있었다.

죽음의 한 형식으로서의 분신은 일반적 자살과 다르다. 공개된 장소에서 극단적 방법으로 행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살론>을 쓴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분신은 일반적인 자살과 달리 공개된 장소에서 ‘현장’의 다중을 의식하기 때문에 특수하며, 높은 치사율과 참혹성으로 인해 훨씬 더 큰 외상적 경험과 기억을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분신자살의 구조와 메커니즘 연구’라는 논문을 쓴 이창언 성공회대 연구교수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는 치명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분신은 강한 열망과 목표를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단순한 도피나 사적 복수심이 아니라 이타성이 강한 동기를 내포하는 죽음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향한 소통을 지향하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남종씨가 힘겹게 모은 돈을
형이 허무하게 탕진했을 때
형은 동생 볼 면목이 없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갔을 때
남종씨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현 시국에 굉장히 분노했대요
‘정치인이냐’고 핀잔받을 정도로
대부분 체념하고 살아가지만
문제의식 간직하고 살았던 거죠
남들 몰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종씨의 삶은 평범했다. 1973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고, 1991년 조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1996년 졸업한 뒤 학사장교로 임관해 7년 동안 복무했다. 그 뒤 택시운전을 하며 검찰공무원과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으나 실패했다. 최근에는 편의점 매니저로 일했다. 1991년 서강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한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처럼 대중운동조직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2009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종태씨(화물연대 양산지회 소속)처럼 노동단체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남종씨가 걸어온 삶의 궤적은 흔히 알려진 ‘열사’의 그것과는 다른 모양새였던 것이다.

19일 오후 6시, 광주 북구에 있는 42㎡(약 13평)짜리 아파트에서 남종씨의 형 상훈(43)씨가 동생의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형제는 남종씨가 군에서 제대한 2002년부터 이곳에서 단둘이 살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거실은 성인 네 명이 둘러앉으면 꽉 찰 만큼 아담했다. 벽에는 얼마 전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 공보물 포스터 사진이 붙어 있었다. 노모가 형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대통령을 섬겨야 한다”며 붙여 놓은 것이었다. 상훈씨는 동생을 잃은 뒤 사진을 떼어버렸다.

“남종이가 없으니까 빨래가 쌓여요. 나는 벗어만 놨지 빨래는 동생이 다 했어요. 난 세탁기 작동법도 잘 모르는데….”

상훈씨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170㎝ 남짓한 키에 다부진 몸을 가진 형은 동생과 입매가 똑 닮았다. 남종씨가 남긴 유품은 소박했다. 일기장 8권, 다이어리만한 우표 수집 앨범, 대학 시절 활동한 문학동아리에서 발간한 문집 3권 그리고 황지우·유하·박철 등 당대 유명 시인의 시집 등이다. 형은 유품 속에서 발견한 동생의 7년 전 반명함판 사진을 본인의 검정 가죽지갑 속에 고이 넣었다.

그가 동생의 분신 소식을 처음 들은 건 송년회 자리에서였다. 렌터카를 빌리고, 펼침막을 제작하는 등 남종씨가 차근차근 마지막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형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 동생은 속에 있는 이야기를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정치 이야기는 단 한번도 나눈 적이 없다. 형은 동생이 국민 앞으로 남긴 유서를 읽고 나서 “글을 잘 썼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형의 기억 속 동생은 “부처 같은 사람”이었다.

“제가 어릴 때 사고를 많이 쳤어요. 남종이가 오랫동안 군 생활 해서 모은 돈도 제가 진 빚 갚는 데 거의 다 썼고요. 남은 돈은 검찰공무원 준비하면서 생활비로 쓰려고 했는데 그 돈마저 제가 다단계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날려버렸어요. 그래도 화 한번 안 내더라고요.”

동생이 힘겹게 모은 돈을 허무하게 탕진했을 때 상훈씨는 도저히 동생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갔다. 그때도 동생은 평소처럼 형을 맞이했다.

“솔직히 각오하고 들어갔죠, 나한테 욕하고 화내지 않을까. 근데 괜찮다고 오히려 저를 다독이더라고요. 이런 동생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제가 형인데 자기가 형인 것처럼 나를 보살펴줬다니까요. 제가 동생한테 의지하고 살았어요. 그런 동생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게 지금에 와 마음에 걸리네요.”

▲ 이남종씨의 생전 모습. 그가 집에서 쓰던 좌식 책상에는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이동하의 에세이집 <홀로 가는 사람은 자유롭다>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홀로 가는 자는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갈 자유와,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못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의 기쁨을 선물로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손지은

죽기 전날까지 남들을 배려하다

담담하게 동생을 회상하던 상훈씨 눈에서 결국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남종씨가 지인에게 남긴 유서 속에는 형에게 남긴 말도 있었다. “형 행복하소.” 상훈씨는 이 짧은 말 속에서 동생의 원망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착한 동생의 마음을 아프게 한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했다.

광주 북구 용두동의 한 편의점에는 40대 중년 여성 점원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5차선 도로 건널목 바로 옆에 위치한 이곳이 남종씨의 마지막 직장이다. 10평쯤 돼 보이는 점포는 일반 편의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점원들의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것부터 월급 지급까지 점포의 전반적 살림을 챙기는 매니저였다.

“이남종씨를 아시냐”고 물었다. 점원은 “잘 모른다”며 대답을 회피하다 “참 선한 사람이었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의 기억 속 남종씨는 어린 아르바이트생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쓸 만큼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아르바이트생들도 ‘점장님’이라는 딱딱한 호칭 대신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사비를 털어 바둑판과 야구공, 배트, 글러브를 사다놓고 시간 날 때마다 아르바이트생들과 즐겼다.

사건 하루 전인 지난해 12월30일에는 남종씨로부터 의아한 연락을 받기도 했다. 매장 금고 안에 월급을 넣어뒀다는 것이었다. 원래 지급일보다 보름이나 앞선 날이었다. 그는 “연말이라 일찍 정산한 줄 알았는데, 자신이 그렇게 갈 것을 알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미리 월급을 지급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남종씨는 다른 직원과 교대를 할 때면 공지사항이나 인수인계할 부분을 꼼꼼하게 메모해 두곤 했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남종씨가 서울역 고가도로 위에 있을 시각, 점원은 교대근무를 하기로 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그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다음날 편의점 본사로부터 분신 사실을 들었다. 그는 “평소 정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차분했던 사람이었다. 분신한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민주투사 고 이남종 열사의 뜻 이어받아 파업투쟁 승리하겠습니다.’ 광주 동구 조선대학교에는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근조 펼침막이 눈에 들어왔다. 이 대학에 영문과 91학번으로 입학한 남종씨는 문학동아리에서 시를 쓰며 ‘분신정국’을 보냈다. 졸업한 뒤에도 후배들의 시화전에 찬조시를 보낼 만큼 창작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문집에는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그리며 서로의 시를 분석한 흔적도 남아 있다. 여백에는 ‘시상전개’ ‘긴장감’ 등이 쓰여 있었다. 학생회나 단체에 가입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새내기 시절에 쓴 일기 속에는 시국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일기장에 적은 “이건 자본주의가 아니야”

‘부의 불균형과 노동에 대한 비정당한 대가…. 이건 자본주의가 아니야. 부의 균형,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 이게 자본주의, 민주사회인데. (중략) 그렇다고 국가의 통제 속에 평등을 이룬다는 소위 사회주의 글쎄. 왠지 모르겠지만 이게 옳은 것 같지는 않아. 자본주의 속에서도 국가의 복지 정책에 의해 진정한 복지 자본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을 텐데.’

과 후배 임은정(39·여)씨는 남종씨를 “순수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남종씨는 학보사에서 활동하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임씨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학보사 기자는 편향된 시각을 가지면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분신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 믿기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남종 선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남종 선배 소식을 듣고 스스로 부끄러웠어요. 저는 대학 시절에 요란하게 구호를 외쳤지만 지금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 있거든요. 최근까지 남종 선배를 만난 친구 말에 따르면 선배는 현 시국에 대해 굉장히 분노했다고 해요. 주변에서 ‘네가 정치인이냐’고 핀잔할 정도로요. 우리는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냐며 체념하고 사는데, 순수한 남종 선배 눈에는 현재 상황이 참을 수 없는 문제로 비친 게 아닐까 싶어요. 문제의식을 계속 간직하고 살았던 거죠. 보이지 않는 곳에서.”

14일 정오에 찾은 광주 북구 망월동 구묘역에서 남종씨 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퇴진’이 쓰인 검은 펼침막이 그의 봉분을 감싸고 있었고, 노랗게 바랜 국화 송이가 이불처럼 덮여 있었다. 열흘 전 놓인 안개꽃은 색이 여전했다. 주변 무덤의 비석에는 ‘박근혜 정권 퇴진’이라고 쓴 빨간 띠가 둘러져 있었다. 구묘역은 1980~90년대 민주화 시위나 노동운동 중에 숨진 이들이 묻힌 곳이다. 1987년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씨도 여기 있다.

정희곤 광주광역시 교육위원은 광주서강고에서 사회교사로 재직하다 1989년에 해직됐다. 남종씨가 2학년에 재학중이던 해였다. 그는 고인의 죽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남종이는* 광주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고, 1991년 분신정국 속에서 대학 첫해를 보냈어요. 학생운동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많았겠죠. 의식의 밑바닥에는 이런 경험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삶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직 유품이 정리되지 않은 그의 방 안 좌식 책상에는 책 한권이 놓여 있었다.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이동하의 에세이집 <홀로 가는 사람은 자유롭다>였다. 홀로 가는 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밀고 나갈 자유와,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하지 못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의 기쁨을 선물로 받는다. 에세이집 내용 가운데 일부다.


* 이 기사는 단비뉴스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으로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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