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문화체험] ② 종손들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일제강점기에 의성김씨 학봉종가 13대 종손 김용환 선생은 외동딸 혼수 밑천을 도박으로 날리고 헌 장롱과 함께 딸을 시집 보냈다. 종가 전답과 종갓집마저 날려버릴 만큼 가산을 탕진했으니 ‘파락호(破落戶)’라는 비난을 받을 만도 했다. 해방 후에야 밝혀졌지만 그것은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내기 위한 위장술이었다.

그는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때 순절한 학봉 김성일 선생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학봉 집안에는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직계후손만 16명이나 된다. 학봉종택은 후손들에 의해 재건됐는데 안동에는 학봉종택 말고도 47가문이 번듯하게 종택을 유지하며 산다.

안동은 예로부터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와 맹자의 고향인 추나라의 이름을 따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불렸고, 지금도 안동으로 들어가는 다섯 개 국도에 세운 관문에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산업화 시대에 큰 공장도, 기관도 없는 안동사람들이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임진왜란 예측 못했으나 위대했던 학봉의 생애

안동에서도 봉정사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학봉종택은 빼어난 외관을 자랑한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인터체인지를 벗어나자마자 금계리로 접어들면 널찍한 잔디 마당에 심어진 키 작은 나무들 덕분에 햇볕 잘 드는 학봉종택이 나온다. 우리나라 전통조경법에 따르면 음택(무덤) 말고 사람이 사는 양택에는 잔디를 심지 않았는데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해 잔디를 심었단다.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전란을 예측하지 못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가 올린 상소의 배경을 살펴보면 좀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게 된다. 그는 후일 “후일 병화가 있으면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는 류성룡에게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 봐 그런 겁니다”라며 내치에 힘쓸 것을 주장한다.

실제로 임란이 발발했기에 그는 죄인이 되어 압송되다가 류성룡의 간언으로 경상우도초유사에 임명돼 민심수습을 맡게 된다. 그가 퇴계의 학문적 적통을 이어받은 대학자였고 영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진주성전투를 지휘했고 끝내 진중에서 병사했다.

▲ 학봉종택은 口자형 정침과 사당, 유물을 보관하는 운장각 등 100여칸으로 지어졌는데, 김종길 종손은 종택을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정성을 다해 맞이한다. ⓒ 이대용

전라도 고경명 장군 식솔 50명을 4년반 돌본 사연

학봉종가 15대 종손 김종길(74)씨는 삼보컴퓨터와 두루넷의 사장 등을 역임하고 귀향한 뒤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종손의 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봉제사와 접빈객을 꼽고 그것이 문중을 단결시키고 자부심을 지키는 힘이라고 설명했다.

“학봉의 부인인 14대조 할머니는 임진왜란 때 전라도 고경명 장군 3부자가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뒤 막내아들과 어머니 등 집안사람 50여 명이 이곳에 왔을 때 4년반 동안 숙식을 제공하셨습니다. 당시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을 터인데 가문의 명예를 걸고 그렇게 한 거겠지요.”

다른 지역에 견줘 안동에서 특히 종가문화가 잘 보존되고 있는 데는 지리적, 역사적 이유가 있다. 안동이 속한 영남의 사림들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중앙 진출이 활발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며 노론이 정계를 장악했고 영남사림은 진출이 제한됐다. 영남 선비들은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개 고향에 서당과 서원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거나 누각과 정자를 지어 선비문화를 계승했다. 안으로는 종가의 종부를 중심으로 음식문화를 발달시켰다. 경당 장흥효의 딸인 장씨부인은 <음식디미방>이라는 최초의 한글 요리책을 남겼다.

▲ 김종길 종손이 종부와 며느리가 손수 만든 다과와 안동 식혜를 사랑채에서 대접하고 있다. ⓒ 이대용

 

종가 개방에 앞장서는 학봉종손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김종길 종손은 정갈하게 차린 다과상을 가리키며 “안동 고유의 고춧가루 넣은 식혜와 다과는 종갓집 종부와 며느리가 손수 만든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종가는 폐쇄적이었다. 특히 종가음식은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맛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종가들이 스스로 집안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안동장씨 경당종택, 의성김씨 학봉종택 등 경상북도 12곳 종가는 최근 종가음식 요리법이 담긴 책을 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올해로 10년 차를 맞은 안동 고택체험은 그간 종가문화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하며 체험객이 해마다 늘고 있다. 안동시 집계로는 지난해 상반기에만도 2만836명이 고택체험을 했고, 그 중 1769명은 외국인이었다.

김종길 종손은 사당은 외부인에게 잘 개방하지 않는다면서도 기자지망생들이니 여학생들까지 보아야 한다며 사당문을 열었다.

“전통적으로 여자는 시집갈 때와 올 때만 사당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죠. 4대가 지나도 신주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제사 지내는 불천위를 모신 이곳에 들어갈 땐 신발을 벗는 예의 정도는 지켜야 합니다.”

▲ 학봉종택 사당에는 불천위인 학봉 선생과 독립투사인 김흥락 선생 등의 신위를 모셔놓았다. ⓒ 이대용

잘못 알려진 유교의 남성우월주의

유교문화를 얘기하면서 남성우월주의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유교 사상을 고수하며 종가 지킴이인 종부(宗婦)의 고된 노동을 강요한다는 얘기도 한다. 그러나 종부들은 사실을 곡해한 것이라고 말한다. 종가에서 제례를 지낼 때 종손은 첫 잔을 올린다. 이어 종부가 두 번째 잔(아헌, 亞獻)을 올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종가의 주요 행사에서 배제되거나 괄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도리어 주부의 지위는 높았다. 종가의 친지들은 제사 때 종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

종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유교식 제사 예법은 4대 봉사(奉祀)다. 이 예법에 따라 종가는 4대 조상의 신위, 즉 고조까지 제사를 받든다. 예외가 되는 것은 불천위(不遷位)다. 불천위는 인품과 공덕이 뛰어난 조상을 사당에 계속 모시는 것을 말한다. 모든 종가가 불천위를 모실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우리나라 종가 가운데 120여 곳에서만 불천위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이 가운데 47곳이 안동에 있다.

종가문화는 특정 씨족문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통 가치의 명맥을 이어온 공공의 문화자산으로서 여기고 오늘날에 맞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올해로 6년차를 맞은 ‘종가문화 명품화 프로젝트’는 지자체와 종가가 뜻을 모아 전통을 이어가려는 것이다. 지역의 종손들이 종가의 문을 열고 종가문화의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영종회를 결성한 데 이어 종부들도 영부회를 만들었다.

고산서원까지 달려온 대산종손의 자부심

첫날 여정을 마치고 숙식을 한 곳은 대산 이상정을 모신 고산서원이었다. 남후면 광음리의 수려한 경치를 끼고 있는 고산서원은 퇴계 학통을 이은 대산 이상정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퇴계 학통의 적전(嫡傳), 곧 정맥은 김성일-장흥효-이휘일-이현일-이재-이상정으로, 안동 일대의 내로라 하는 가문 출신들이 이어받았다.

▲ 대산종손 이방수씨는 이상정 선생의 행적을 설명하기 위해 밤늦게 고산서원으로 찾아오는 열의를 보였다. ⓒ 이대용

대산은 ‘소퇴계(小退溪)’라 불릴 정도로 학문이 깊었다. 기숙사에 해당하는 백승각과 청림헌은 서원의 동재와 서재인데 여느 서원의 동∙서재보다 커서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음을 말해준다.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에는 273명의 문인이 제자로 수록돼 있다. 5km쯤 떨어진 대산종가에서 연락을 받고 온 종손 이방수(64)씨는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대산 선생이 숨을 거두는 자리에 그를 따르던 제자 70여명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장례에는 사림 1200여명이 모였는데, 이방수 종손은 제자가 많았던 까닭이 벼슬보다 후학양성과 저술에 뜻을 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평생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대산의 태도는 제자들이 기록한 ‘고종일기(考終日記)’에도 나온다. 선생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과 학문에 대해 문답을 나누었다고 한다.

‘죽은 민속촌’ 아닌 ‘살아있는 하회마을’

▲ 하회마을 양진당에서 문중 어른들이 낮부터 모여 제사 지낼 준비를 하고 있다. ⓒ 이대용

마지막으로 들른 하회마을은 마을 전체가 안동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보고 싶어했던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봉정사와 함께 들른 곳이기도 하다. 류성룡을 기리는 서애종택의 영모각에는 임진왜란을 극복한 지도자의 풍모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갑주와 철모, 그리고 거인이나 신을 만한 큰 가죽신이 눈길을 끈다. 이런 큰 신발은 실용성보다 상징성이 컸다고 한다. 사랑방 댓돌 위에 큰 신발을 놓아둠으로써 ‘여기 대인이 있다’는 것을 상징했다는 얘기다.

서애의 형님댁인 양진당에서는 마침 제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들의 부친 호를 딴 ‘입암고택’이라는 현판이 붙은 대청에는 문중 어른들이 모여 제사 모실 일을 논의하고, 마당에는 놋그릇과 제기를 꺼내 오거나 음식을 장만하는 이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하회마을은 죽은 민속촌이 아니라 살아있는 후손들의 주거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각별하다. 이 마을에는 류돈우 전 국회의원, 류진 풍산그룹 회장, 탤런트 류시원씨 등의 자택들이 있는데, 이들도 가끔 고향집에 들른다고 한다. 서애가 후학을 기른 병산서원은 서원조경의 백미로 꼽힌다. 서원 마루에 걸터앉아 만대루를 통해 병산과 낙동강을 내려다보면 8개 기둥 사이로 7폭 병풍이 그대로 펼쳐진다.

▲ 누각의 이름을 두보의 시구인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에서 빌려온 만대루(晩對樓)는 조선 건축에 보이는 여백미의 전형이다. ⓒ 이대용

안동 선비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의병과 독립투사

종택과 서원의 아름다움보다 머리 속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은 이곳을 중심으로 이어져온 공동체문화와 선비정신이다. 학문과 덕행을 바탕으로 한 선비정신을 우리 사회로 발산하는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선비정신은 예의범절을 지키고 기존 전통만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명을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발현된다.

사대부 문화가 융성하기 시작한 조선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안동의 선비문화는 우리의 굴곡진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부러워할 만큼 퇴계학의 계보를 면면히 이어오는 한편으로 외적이 침입했을 때는 의병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로 목숨까지 던질 수 있었던 것은 문중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의식으로 설명할 도리밖에 없다.

이상룡 김동삼 류인식 김지섭 김시현 이육사 김재봉 권오설 권오직 등 좌우익을 망라하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안동의 명문가 출신이다. 평상시 문중 자랑은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그런 자부심이 유사시에는 놀라운 의기로 표출되는 것이다.

종손들은 종가와 서원 등을 개방하고 알리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스스로도 실천한다. 전통을 보존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선비정신과 종가문화의 가치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비정신과 종가문화는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의 문제와 갈등을 푸는 근본이치를 제공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터이다.


[지역∙농업보도실습]은 1학기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함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지역 이슈와 농업•농촌 문제에 대한 기자•PD 지망생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신설한 강좌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프로그램은 지역∙농촌 현장실습과 여행에 동참하는 교수가 현장에서 취재와 기사 틀짜기를 지도하고 나중에 첨삭까지 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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