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봉하마을에 다녀와서

연예인이 그렇듯이 유명인의 자살은 한동안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다. 그리고 1주기 때 다시 '반짝 조명'을 받다가 점점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다. 인간에게 망각이 없다면 슬픔이 누적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한 이가 우리 사회의 모순이나 청산해야 할 것들에 맞서 싸우다가 좌절 끝에 몸을 던진 사람이라면, 망각은 슬픔의 치유가 아니라 책임회피다. 그런 자책감과 함께 떠오르는 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유시민은 그를 '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이'를 품은 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연민의 끈을 너무 쉽게 놓아버린 것은 아닌가? 그가 몸을 던진 의미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건 아닌가? 그를 좀 더 이해하고 싶었다.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를 읽은 뒤 다시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다가 그에 대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되살리고 싶어 봉하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지난 8월 2일 제천에서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일곱 시간이나 걸려 봉하마을에 도착했다. 폭염이 절정을 이뤄 김해지역의 최고온도가 36도까지 치솟은 날이었다. 마을에는 뜨거운 햇살을 피할 그늘조차 없는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주차장은 꽉 차있었고 관광버스도 여러 대 줄지어 있었다.
 
'봉하마을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책 <운명이다>의 첫 머리다. 일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나도 한참 동안 '봉하마을'이 아니라 '봉화마을'인 줄 알았다. 뒷산 이름이 봉화산인데다, 왠지 노 대통령이 사는 세상은 '하(下)'자보다 더불어 사는 '화(和)'자가 더 어울릴 것 같아 착각을 한 것일까?
 
"나는 개헌현판식 운동,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규탄투쟁, 1987년 초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규탄시위, 4·13호헌 반대투쟁 등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갔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전문 변호사'가 되었는데, 그것이 '운동 전문 변호사'일 줄은 미처 몰랐다."(<운명이다> 90쪽)
 
많은 386 인사들이 대학 때 저항의식을 조직적으로 키웠다면 노무현의 시작은 다소 뜬금없다. 1981년 9월 부림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부산지역에서 사회과학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들을 변호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당시 부산에는 두 명의 인권변호사가 있었지만 그들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때 노무현이 '어쩌다' 부족한 일손을 돕게 되었다. 고문 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청년, 실성한 부모들을 보며 그가 새로운 길로 접어든 것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에 호박 넝쿨이 자라고 있다ⓒ 황상호

주인 없는 그의 생가는 방문객들로 붐볐다. 본채 하나와 헛간 하나가 전부였다. 마당에는 장독대와 절구들이 놓여있고 부엌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가마솥과 방금 전까지 사람 손길이 닿은 듯한 그릇들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낮은 담벼락에는 호박 넝쿨이, 집 앞 텃밭에는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일곱 살까지 여기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책 읽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혼자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책에 도움이 된다면 같은 책을 여러 권 구입해 관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 대통령은 진보 사상을 담은 책 <진보의 미래>를 쓸 예정이었다. 옛 보좌관들을 모아서 토론도 하고 구체적인 계획도 짰다.
 
그 밖에 여러 고민들은 웹사이트에서 토론을 통해 진전시킬 예정이었다.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는 그가 마지막까지 관심 있게 읽었던 책을 <오마이뉴스> 강독회를 통해 풀어낸 책이다. 결국 '책'이 주제가 아니라 '노무현'과 '노무현의 고민'이 주제다. 그 중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가 쓴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에서는 그의 강점과 단점을 엿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강연을 통해 해석했다.
 

▲ 노무현 추모의 집에 있는 노 전 대통령의 물품이다. 선물로 받은 목조 의자와 생전 즐겨 있었다던 책 <유러피안 드림>과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이다. ⓒ 황상호

"중대한 변화는 반드시 갈등을 유발합니다. 만델라가 얼마나 극심한 갈등을 일으켰습니까? 마틴 루터 킹도 결국 그 갈등 속에서 암살당한 거잖아요. 그런데 이 갈등이 꼭 나쁜 게 아닙니다. 갈등은 변혁의 과정에서 항상 역동적인 힘으로 융합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특히 상상력의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노 대통령 집권 기간에 참 많은 갈등이 있었다. 한미FTA, 신행정수도, 대북송금 특검, 대연정 등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을 벌였고, 검사나 언론과도 자주 갈등이 고조됐다. 전 정부가 피하거나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들이다.
 
조기숙 전 홍보수석 말처럼 결국 변혁적 리더의 또 다른 모습인 '갈등의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 굳이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 아닌데도 '거친 말' 때문에 오해를 산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좌파 신자유주의론'이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책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에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노 대통령이 냉소적으로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당시 신자유주의에 따른 비정규직 양산과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그 와중에 진보 인사 중 최장집 교수가 "지난 10년의 민주정부가 신자유주의의 레일을 깔았다"며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했다. 노 대통령은 보수에서는 좌파로, 진보에서는 신자유주의자로 동시에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 때 노 대통령은 푸념으로 '좌파 신자유주의'를 말했고, 그것을 언론이 제멋대로 해석했다.
 

▲ 방문객들이 바닥에 적힌 박석의 글귀를 보며 걷고 있다.ⓒ 황상호

사람들을 따라 걷다보니 금세 그의 묘가 나왔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깔린 박석의 글귀를 읽었다.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바보 대통령 당신이 그립습니다." 박석들은 그가 묻힌 곳으로 향해 있었다.

 

사람들은 하얀 장미로 헌화하고 기도했다.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 가족은 비석을 뒤로 하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몸에 가려 납작하게 엎드린 비석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들은 사진에 무엇을 담으려 했던 걸까?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오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단순한 호기심? 아니면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 그것이 무엇이든 노무현의 가치를 한 번쯤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안고 노무현이 마지막으로 올랐다던 산에 올랐다. 마을이 한눈에 펼쳐졌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마을 공동체를 살리겠다며 일군 논, 한 구석에 지어진 노란색 오리집 그리고 일부 언론이 '호화저택'이라고 비난하던 그의 집조차 이미 자연의 한 조각이 되어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그. 그러나 그의 집조차 '사람 없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그가 두고 간 안마당에도 한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 기사는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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