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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이덕희, 라켓으로 소리치다
[단비스포츠] 경력 9년 차, 듣지 못해도 우승컵은 거뜬
2013년 04월 20일 (토) 11:14:23 정혜정 기자 smse7728@naver.com

“덕희야, 새소리가 정말 아름답지 않니?”

아침 훈련 길에 오른 아들에게 말을 건네도 반응이 없다. 대견한 아들 덕분에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불현듯 현실과 마주할 때면 가슴 한편이 미어진다. 지난 15년간 단련한 긍정의 힘도 이럴 때는 소용이 없다.

최근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27•스페인)의 칭찬을 받아 국내외 언론의 관심을 받은 이덕희(15•제천동중)는 박미자(39)씨의 아들이자 청각장애 테니스 국가대표 선수다. 나달은 지난 6일 자신의 트위터에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최연소 선수인 이덕희가 장애를 이겨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항상 도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는 글을 올렸다.

지난 3일 일본에서 열린 제3회 쓰쿠바대 국제 퓨처스대회(총상금 1만 달러) 단식 본선 1회전에서 이덕희가 미야자키 마사토시(일본, 1675위)를 2대 0으로 누르고 랭킹 포인트 1점을 획득한 후 나온 슈퍼스타의 격려였다.

   
▲ 테니스 주니어 국가대표 이덕희 선수가 모교인 제천동중학교에 마련된 코트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 정혜정
2010년 에디 허 국제 주니어 테니스대회 12세부에서 단식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테니스계의 샛별로 떠오른 덕희는 이후에도 국제무대에서 단식, 복식부문 우승을 잇달아 차지하는 등 유망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중학교 1학년 때 주니어 국가대표에 발탁된 뒤 지난해 11월에는 대한테니스협회의 추천으로 최연소로 성인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처음 테니스 라켓을 잡았을 때 덕희도 어머니 박 씨도 이런 날이 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일곱 살 때 결정한 진로, ‘테니스는 나의 운명’

세 살 때 청각장애 판정을 받은 덕희는 일 년 뒤 청각장애 특수교육기관인 충주성심학교 유치부에 입학했다. 4년 동안이나 제천 집과 충주를 오가야 했다. 7살 겨울, 초등학교 취학 통지서가 날아들자 부모의 고민이 깊어졌다. 보통 고등학교 때 겪게 되는 진로 선택 고민이 덕희 가족에겐 빨리 찾아왔다.

“(장애를 지닌) 어린 아이를 두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더라고요. 남편과 상의해서 운동을 시키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에 종목을 고민했죠. 단체 종목은 핸디캡이 있어 안 되고, 골프는 돈이 많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고민 끝에 덕희에게 테니스 라켓을 쥐어줘 봤어요.”

초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덕희는 두 달간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평소 야구와 축구를 좋아한 아들은 테니스에도 금세 흥미를 붙였다. 충주성심학교를 떠나 테니스부가 있는 제천의 일반 초등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1년간 지켜보고 가능성이 없으면 다른 종목으로 바꿔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에 부담 없이 시작한 게 바로 테니스였다.

훈련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테니스 저변이 열악한 탓에 빈 코트를 찾아다니며 연습하는 일이 잦았다. 훈련비와 시합비를 포함해 한 달에 200만원 가까운 비용이 덕희에게 들어갔다. 덕희 가족에겐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이후 국내 대회에서 덕희가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하자 신백초 테니스부에 후배들이 한두 명씩 늘어났고 후원도 들어왔다. 테니스부 체계가 갖춰졌고, 논바닥 같던 코트도 하드코트로 바뀌었다. 좋은 성적의 배경엔 물론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 듣지 못하는 핸디캡이 있지만 꾸준한 훈련으로 출전하는 대회마다 상위권에 랭크하는 이덕희 선수. ⓒ 정혜정

‘메뚜기 훈련’으로 성적 내자 지원 쑥쑥

하루 훈련은 6시간 정도. 오전 10시, 준비운동으로 몸을 푼 뒤 덕희는 제천동중에 마련된 코트에서 개인코치와 두 시간가량 훈련한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와, 뙤약볕 아래서 다시 랠리를 이어간다. 수백 번의 서브와 스트로크, 해가 진 뒤에야 덕희의 지상 훈련이 끝난다. 체력단련 코치가 있는 체육관으로 이동해 마무리 훈련을 하면 덕희의 하루 일과도 끝이다.

“덕희를 관리해주는 에이전트와 후원 기업이 생겼어요. KDB 금융그룹과 현대자동차에서 투어 비용과 차량을 지원해주고 있어요. 지난달부터는 제천 서울병원에서 의료지원을 받고 있고요. 이런 지원 속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면 후배들이 기회를 잃을 수도 있잖아요. 덕희가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어린 나이지만 덕희의 남다른 책임감은 성적으로 이어졌다. 올해 초 출전한 2013 호주오픈 주니어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해 국내 최연소로 메이저 주니어대회 본선 승리 기록을 달성했다. 우승컵을 마주하기까지 힘든 시간도 많았다. 덕희가 듣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경기를 유리하게 끌어가려는 선수도 있었다.

“낮은 등급 대회는 심판 없이 시합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 상대 선수가 이번 볼이 인인지 아웃인지 시그널(신호)로 알려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 덕희가 포인트를 헛갈려 하거든요. 덕희가 경기를 중단하고 어필하면 ‘얘 뭐라는 거야’라며 못 알아듣는 척 넘어가는 선수들이 종종 있었어요.”

더 가슴 아픈 경우도 많았다.

“상대 선수 부모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병신 같은 애한테 지냐’며 자식을 혼내는데 정말 ‘멘붕’이었어요. 욕을 들은 것보다 그 아이의 미래가 더 걱정되더라고요.”

   
▲ '이덕희 전담팀' 박경훈 코치(26), 이덕희 선수, 어머니 박미자씨. ⓒ 정혜정

어디서든 자신만만, 대통령 앞에서 스매시

하지만 박 씨는 듣지 못하는 아들을 테니스 선수로 키워내면서 속상하고 우울한 일보다 즐겁고 고마운 일을 더 많이 경험했다고 말했다.

“덕희는 참 복이 많은 아이인 것 같아요. 청각 하나를 안 주신 대신 다른 능력을 너무 많이 주셨거든요. 보통 아이들과 비교해 운동도 잘 하고, 시각적 능력도 뛰어나고요. 성격도 얼마나 명랑 쾌활한지 몰라요(웃음). 언론에 청각장애 선수라고 나올 때나 ‘아 우리 애가 안 들리지’라고 생각하지 평소에는 인식을 안 하고 살아요. 덕희도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일이 거의 없고요. 저희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키웠거든요. 안 들리는 것 때문에 주눅 들지 말고 어디서든 당당하게, 말도 어눌하면 어눌한 대로 하라고 가르쳤고요.”

어디서든 자신만만한 덕희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코트에 선 날의 긴장감은 잊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덕희는 ‘2012 KDB 코리아오픈 프로암 테니스대회’ 번외경기에서 이 전 대통령과 짝을 이뤄 복식 게임을 치렀다. 할아버지뻘 되는 상대팀을 배려해 덕희는 힘 조절을 했지만 파트너였던 이 전 대통령은 “왜 이렇게 살살 쳐, 좀 더 ‘빵’ 쳐 봐”라며 농을 걸었다. 현직 대통령과 함께 땀 흘린 이 날의 경험도 덕희가 두둑한 배짱을 기를 수 있는 자산이 됐다.

박 씨는 많은 경험을 통해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아들을 지켜보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평범하지 않은 아들 덕분에 평범하지 않게 사는 것도 좋아요. 힘든 정도로 따지면 다른 것은 안 힘들겠어요? 남들 힘든 만큼 저희도 힘들 뿐이에요. 덕희를 키우면서 남편과 저는 덕희의 몸을 키우고 덕희는 우리를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는 것 같아서 덕희에게 고마워요. 9년 동안 즐겁게 운동하는 것도 자랑스럽고요.”

청각장애 아들이 비범한 기량을 보일수록 언론과 국민의 관심은 높아졌다. 뿌듯하긴 하지만 지나친 관심에 부담도 적지 않다.

“덕희가 성인 시합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 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노력해서 이룬 건데, 가끔 여기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때가 있더라고요. 덕희는 이제 중3이잖아요. 키도 중3, 힘도 중3 이거든요. 이 상황에서 성인 역할을 요구하면 분명히 오버페이스가 걸려요. 덕희는 이를 컨트롤 하지 못하니까 저희가 옆에서 잘 관리해줘야죠.”

친구 손대신 라켓 잡았지만 후회 없어

중학생 덕희는 교실이 낯설다. 적막한 교실에서 45분간 칠판만 바라보는 것은 덕희에게 힘든 일이다. 덕희에게는 코트가 교실이고, 코치님이 친구이자 선생님이다. 이른 나이에 운동을 선택했기 때문에 또래처럼 정상적인 학교생활은 못하지만 후회는 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일찌감치 발견했고, 거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지난 9일 제천동중에서 훈련을 마친 이덕희 선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정혜정
아시아 주니어 테니스 챔피언십(B1) 대회를 앞둔 지난 9일, 제천동중에서 훈련 중인 덕희에게 긴장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연습할 때는 떨리는데 막상 시합에 들어가면 안 떨려요. 코치선생님이랑 아빠가 경기 때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신 것 다 외웠어요. 저 9년 됐어요. 다 외웠어요.”

지난 15일부터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고 있는 B1 주니어대회에 출전한 덕희는 현재 단식 결승전 티켓을 따낸 상태다. 국제대회 통산 단식 10번 째 우승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덕희는 결승전 경기 시작 신호가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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