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바람'

▲ 장경혜 기자
만물은 바람을 본 적 없지만 그 존재를 안다. 바람의 종류와 의미도 각양각색이다. 꽃과 신록은 바람으로 하여 스스로 피고 지는 때를 안다. 봄바람이 가지를 흔들어주지 않았다면 겨우내 잠자던 꽃눈들이 어떻게 일시에 깨어날까? 봄바람이 막 태어난 잎사귀를 어루만져 조막손을 펴주지 않는다면 드넓은 산천이 언제 신록으로 뒤덮일까? 꽃샘바람이 매서운 줄 알기에 버들강아지도 털옷을 입고 태어난다.

꽃 피는 계절에 눈보라가 쳐 사람들 마음까지 흔들어놓았다. 이 봄 늦은 밤, 건물의 모서리를 휘돌아나가는 세찬 바람 소리에 건물 안에 있는 내 마음까지 스산해지는 것은 왜일까? 한 번도 바람을 본 적 없지만, 바람의 방향과 강도, 그리고 다양한 울림의 결들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때로는 자신의 처지에 따라 바람의 의미까지 자신만의 것으로 해석한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와 가치들. 그것들이 존중되던 시대가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다. 친한 친구가 암에 걸렸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보자. 타자가 곤경에 빠졌을 때, 비로소 나는 그와 거리가 어떤지를 측정하게 된다. 타자와 관계 맺는 방식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면, 그 아래에 '연민'이, 그 밑에 연민보다 덜한 '공감'이, 공감보다 덜한 '동정'이 있지 않을까? '관용'이나 '환대'도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타자와 거리가 좁아지고 합리적인 생각이 없어진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타자와 거리가 멀어지고 경계는 분명해진다. 위쪽으로 가면 골치가 아파진다. 사랑에 빠지면 어떻게 변하는가? 자기 존재가 위기에 빠지고 복잡하게 변화한다.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 하지만 그것들은 큰 의미로 삶에 다가서고 우리의 정신을 압도한 뒤 바람처럼 홀연 사라진다.

문학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도 그런 것 같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개 비극적 상황에 처한다. 그들이 원치 않았던 상태다. 하지만 그들은 이 상태와 존재를 '초극'한다. 존재가 갖고 있는 유한함, 지성의 유한함, 몸과 마음의 유한함 등을 뛰어 넘는 것이다. 뛰어 넘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비극적이다. 하지만 아름답다. 사랑, 동정, 공감, 연민…, 보이지 않은 감정들이 서로간의 거리를 좁혀 진정성의 윤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 존재의 운명과 한계를 알면서도 노력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 시대의 지성들이 인간의 진짜 ‘척추’라고 믿고 활자에 박제해, 애써 간직하려 했던 귀한 가치들이다.

모든 가치를 시장원리에 위임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가 만연하면서, 삶에서 유효했던 윤리가 사라져가고 있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쓴다.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던 윤리를,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자본이 압도했다. 자본의 권능 아래 윤리체계 전반은 재편되고 전복되었다.

강남역 앞에 유학원광고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완벽하게 간판이 되어 거리에 전시된 구조물이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사람이 너무 값싸게 취급되고 있다. 싼 임금을 탓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 연대가 필요할 때 우리는 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탄 배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바람이 불고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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