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웹툰으로 기후변화 심각성 알린 안성호·김지석씨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미래. 평균 기온이 올라간 지구는 반복되는 자연재해로 인해 온통 사막이 됐다.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라면 ‘그래도 희망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주인공들을 보여주겠지만 인터넷포털 다음의 ‘만화속 세상’에 연재된 <노루>는 달랐다. 주인공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지구는 변함없이 뜨겁고, 인류에겐 아무 희망도 남지 않았다. 외부 행성 ‘델타’에서 온 화자(내레이터)는 묵묵히 영상만 촬영하다 자기 별로 돌아갔다.

“딱 하나, ‘희망이 없게 그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기후변화는 (일단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으면 했어요.”

이 작품을 기획한 김지석 주한영국대사관 선임 기후변화담당관이 지난달 28일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화석연료 등의 남용으로 인한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화가인 안성호 작가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지구’를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 웹툰 '노루'의 한 장면.

모래로 뒤덮인 서울, 무전기로 소통하는 남녀

범지구적인 온난화 대처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영국은 한국을 포함한 각국 대사관에 기후변화팀을 운영하면서 현지 국민들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김 담당관은 어떻게 하면 한국 대중들에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더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다 젊은이들이 많이 보는 인터넷 만화, 웹툰을 떠올렸다고 한다.

“기후변화로 가장 고통 받을 이들이 사실 젊은 세대죠. 이 작품을 보고 지구온난화가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받아들였으면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물론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높으리란 생각도 했고요(웃음).”

전작 <키스우드>를 통해 환경문제를 다룬 일이 있는 안 작가는 김 담당관의 제안이 들어왔을 때 흔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지난 번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평생 환경운동을 해 온 활동가들을 만나 ‘가치 있는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노루>는 목적이 있는 홍보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그런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다. 김 담당관이 최소한의 개념만 주고 창작과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종말’이라는 키워드를 받은 안 작가는 ‘서울이 모래로 뒤덮인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다. 여기에 ‘건물 위아래에서 무전으로 이야기하는 남녀’라는 설정을 가져와 <노루>의 틀을 완성했다. 제목은 작품 속 주인공이 지구온난화로 가장 먼저 멸종한 동물, 노루의 그림이 있는 옷을 입었기 때문에 그렇게 붙였다.

▲ 기후변화 웹툰 프로젝트를 기획한 주한영국대사관 김지석 선임기후변화담당관(좌)과 작품을 그린 안성호 작가(우). ⓒ 임종헌

“연재를 시작하기까지 두 달 밖에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스토리를 짜고 퇴고를 할 여유가 없더군요. 개략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만 짠 상태에서 그리기 시작했죠. 담당관님이 주신 책이나 영화, 각종 자료를 많이 봤는데 가장 도움이 된 건 사막이 배경으로 나오는 게임이었어요(웃음).”

<노루>는 행성 ‘델타’에 사는 화자가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파악하기 위해 지구에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가 만난 노루는 세계연합의 활동가로, 사람들에게 물과 식량을 제공하는 한편 카메라와 공책에 지구의 현실을 기록한다. 세계연합의 지원이 끊기면서 노루는 궁지에 몰리고, 결국 숨지면서 화자에게 ‘전에 도움을 준 소녀에게 식량과 카메라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다. 만화는 처음에 활기찼던 노루가 점점 힘을 잃고, 식량을 위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안 작가는 “내가 그런 극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 담당관도 “절망적인 환경에 놓인다면 누구나 그렇게 행동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달 영문판 출간…OECD, EU에서도 관심

지난해 3월부터 6개월간 연재된 노루는 총 조회수 15만을 기록했고 10점 만점에 9.7의 평점이 나올 만큼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지난 2월 28일에는 전시회를 겸한 ‘책거리 토크’가 주한영국문화원에서 열리기도 했다. 1백여명의 독자들 앞에서 안 작가는 ‘힘을 주지 않은 담백한 연출’을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키스우드>를 그릴 때는 연출을 통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 순간에 감동적일지언정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진 않더군요. <노루>는 독자가 작품을 보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담백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죠.”

 

▲ 영국문화원에서 열린 웹툰 '노루' 책거리 토크 현장. ⓒ 임종헌

보수적인 대사관측의 동의를 어렵게 구해서 웹툰 작업을 추진한 김 담당관은 <노루>의 성과가 매우 만족스럽다고 했다. 대사관에서 아무리 거창한 활동을 해도 10만 명이 보기 힘든데 <노루>는 그 이상을 해냈기 때문이다.

“동영상도 찍어봤고, 각종 세미나 같은 것도 해봤지만 이만한 반응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퀄리티 높은 웹툰 한 편이 이렇게 기후변화 문제를 전달할 수 있으니까 위에서도 좋아하시더군요.”

김 담당관은 내친 김에 <노루>의 영문 번역본 샘플을 만들어 대사관 직원들과 세계 각지의 영국대사관에 전달했다. 마침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이 불던 시점이다. ‘한국에는 강남스타일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것도 있다’는 식으로 홍보했더니 반응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전문 인력을 고용해 <노루> 영문판을 완성했다. 영문판은 외교통상부 주관으로 오는 21, 22일에 열릴 ‘국제 기후변화와 안보회의’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이미 10여 개국의 영국대사관이 <노루>를 기후변화 홍보에 활용하기로 결정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에너지기구(IEA), 유럽연합(EU)에서도 <노루>를 기후변화 교육 자료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만화대국’ 일본에서도 관심을 보여 4월에 일어판도 나온다.

 

▲ 영국문화원에 전시된 '노루' 영문판 공개컷. ⓒ 임종헌

<노루>에 대한 뜨거운 반응은 어려운 주제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대중의 관심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기후변화의 위험성에 관심을 갖고 행동에 나서주기를 희망했다.

“(날씨 등을 통해)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노년층은 ‘나 살아있을 동안은 별 일 없겠지’하며 방관합니다. 젊은이들은 기후가 정말 변한건지 잘 모르죠. 또 전문가들은 과학의 특성상 ‘100% 확실하다’고 말하지 못하니까 정치인들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지구 평균 기온은 벌써 0.7도 올랐어요.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김지석)

“인류는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이미 충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루>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행동에 나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안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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