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특종으로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 사건 재점화
국정원 중립화…총리 직속으로 대통령 정보독점 막아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하늘이 무너져 내릴(Sky fall) 때도, 우린 굳건히 서서 함께 맞설 거야.’ 첩보영화 <007 스카이폴>은 주제가를 최고 인기 영국 가수 아델이 불러 더욱 흥행에 성공했다. 노랫말에는 영국 첩보기관 ‘엠아이6’(MI6)의 영광을 유지하려는 제임스 본드의 소망이 담겨 있다. 본드는 가상의 첩보요원이지만 영국인들은 그에 대한 호감으로 세계 최고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한국에서도 <베를린> <7급 공무원> <아이리스> <에어시티> 등 국가정보원을 소재로 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숱하게 제작돼 히트를 쳤다. 그러나 관객이나 시청자들 반응은 대개 ‘재밌다’ ‘멋있다’로 끝날 뿐, 국정원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조의 한숨을 쉰 이가 많았을 터이다. ‘저렇게 고생하는 요원도 많은데 국정원이 바가지로 욕을 먹고 있으니….’

영화는 어디서나 현실이 아닌데도 자국 정보기관에 대해 애증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툭하면 정치에 개입해온 중앙정보부의 어두운 역사를 국정원은 아직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임명된 일부 간부들이 국정원을 정치의 도구로 전락시켜왔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때 국정원 직원 등이 여론 조작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건은 국정원법 위반인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다. 민주주의는 여론 정치인데 그 여론의 일부가 국가기관이 개입해 ‘만들어낸 것’이라면, 그런 민주주의는 독재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조작된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허울뿐인 민주주의는 억압에 의한 독재보다 더 야비하다. 대중이 동의하도록 ‘만들어’ 정당성을 획득했으니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경찰이 한밤중에 국정원 직원의 혐의를 부인하는 엉터리 수사발표를 하고 추가 수사마저 기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겨레>가 터뜨린 연속 특종은 사건의 불씨를 되살려 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정원 직원, 대선 글 안 썼다더니 야당후보 비판 등 91개 글 올렸다’(1월31일치)와 ‘국정원 직원 명의 아이디 5개 ‘제3의 인물’이 썼다’(2월4일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 등에 대한 무차별 소송은 위협 효과를 노린 것으로 박정희 시절 정치공작 때 휘두르던 폭력과 다를 바 없다. 법의 힘을 빌린 폭력으로 진화한 차이는 있지만.

사법당국이 사건 수사를 제대로 했다면 기사를 쓸 필요도 없었던 일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토론회에서 사건의 본질을 “20대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라 규정했지만, 이제 집권했으니 <한겨레>가 밝힌 사실만으로도 엄중 수사를 명령해야 옳다. 그러지 못한다면 자신이 말한 ‘법과 원칙’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원칙이 ‘자신에게는 관대하게, 상대에게는 가혹하게’로 해석된다면 법치를 망치고 궁극적으로 자신을 망치고 만다.

‘의제 설정’, 곧 ‘이슈 파이팅’을 할 때 <한겨레>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은 종종 특종 기사조차 대안 제시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국정원이 끊임없이 정치에 개입하게 되는 원인은 국정원법에 있다. 국정원법 제2조에 ‘국가정보원은 대통령 소속으로 두며,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다’고 돼있다.

이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박정희와 김종필의 작품이다. 정보장교 경력이 있던 그들은 정보를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이기게 된다는 점과 정보가 다른 사람에게 집중될 때의 ‘권력이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독대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으며 권력의 아성을 쌓았다. 10·26과 12·12사태는 독대를 하던 정보기관장들의 권력싸움이었다.

 

 

비크리와 멀리스가 정리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비대칭적 정보이론’은 서로 간에 보유한 정보량에 큰 차이가 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설명한다. 이 계열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주인-대리인 문제’를 제기한다. 대리인이 주인의 정보부족을 악용하면 주인을 배신하게 되는데 국정원의 일탈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국정원 조직을 포함한 관료는 국민의 대리인이고 대통령은 대리인의 총수일 따름인데도 정보를 틀어쥐고 국민을 배신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영국에서는 최고권력자에게만 정보가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내외 정보조직을 이원화하고, 국외정보 수집기관(MI6)은 외무부에, 국내정보 보호기관(MI5)은 내무부에 소속시켰다.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는 국방부 소속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대통령 직속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바뀌어도 국장의 임기가 지켜질 만큼 중립적이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때는 전직 요원이 연루됐는데도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1993년에는 정치첩보 대신 경제첩보 수집에 집중하겠다는 역할 전환을 선언했다.

반면, 우리 국정원 간부직은 정권의 전리품으로 여겨진다. 원세훈 국정원장은 서울시 근무 당시부터 이명박 시장 측근이었고, 남주홍 1차장도 인수위 출신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가 맞는 사람으로 물갈이하는 바람에 자체 양성한 인재를 아끼는 풍토가 사라지고 줄서기가 성행했다. 전문요원들이 정치적 중립을 원한다 해도 설 자리가 없다.

정부조직법 개편이 논란을 겪고 있는데, 야당과 <한겨레>를 비롯한 진보언론이 핵심을 놓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야당은 인수위의 개편안을 비판할 뿐 주도권을 쥐고 다른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의제설정에서 진보언론도 보수언론의 대항언론 구실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야당은 국정원 직원의 선거개입이라는 ‘큰 건’을 잡고도 성명서나 발표하면서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정원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관건이다. 책임총리제 논란이 있는데 총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은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국정원을 총리 아래 두는 것은 대통령만을 위한 정치첩보 수집을 막고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의 기능이 약해진다는 우려는 난센스다. 아예 각 부처에 소속시킨 영국 정보기관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국정원에 대해 정치적 중립을 확보해주고 민주적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면 국민에게 사랑과 제보를 받는 정보기관이 될 수 있다. 이스라엘 모사드의 최대 정보원도 ‘사야민’이라는 유대인 협조자들이다. <007 스카이폴>에서 취미를 묻자 본드는 “부활”이라고 답한다. 우리 국정원도 구태를 벗고 새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대한다.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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