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양승희 기자

▲ 양승희 기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하루 평균 1만5천 관람객이 방문한다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는데 유독 어떤 공간에 수십 명이 몰려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목을 길게 뺀 채 무언가를 보려고 애쓰는 관람객들 시선 끝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걸려 있었다. 세계적 명화로 손꼽히는 <모나리자> ‘원본’을 마주하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었지만, 너무 많은 관람객 때문에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사람들에 떠밀려 그림 바로 앞에까지 갔지만 몇 분도 안 돼 빠져 나와야 했다. 

박물관에서 나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에 들러 아쉬운 대로 <모나리자>가 익살스럽게 그려진 냉장고자석 하나를 샀다. 진품을 보는 것은 분명 색다른 느낌이었지만, 오래 보지 못했다 해서 그리 속상하지는 않았다.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원본과 똑같은 그림을 언제든 찾아 볼 수 있고, 복제품이지만 냉장고자석으로도 <모나리자>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제품이 널렸는데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 진품 <모나리자>를 보려고 애쓸까? 아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원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크프루트학파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오직 예술작품의 원본만이 풍기는 분위기를 ‘아우라(Aura)’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인간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예술작품 앞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으며,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 작품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경외감을 느낀다. 원작이 지니는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지금 여기에서만 볼 수 있다는 ‘1회성’이라는 아우라가 수용자에게 작품에 대한 신비감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고대 예술품을 보면 사람들은 벽화에 들소나 고래 등을 그려놓고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다. 벽화를 단순한 그림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 앞에서 주술적 행위를 했다. 중세시대 수많은 그림과 조각, 음악 역시 신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예술작품에 압도당하는 느낌은 권위나 힘에 복종하는 것과 유사하다. ‘아우라의 문화시대’에서 예술작품은 종교, 정치와 맞물렸고 아우라는 곧 ‘권위’를 의미했다. 대중들은 쉽게 작품에 동화했고, 등장인물과 일체감을 느끼며 주어진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복제 기술’이 발달하고 무수한 복제품이 생겨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자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굳이 원본을 찾지 않고 복제품만을 가지고도 예술적 욕구를 채울 수 있게 됐다. 아우라의 쇠퇴는 연이어 전통적 권위나 의식의 붕괴까지 가져온다. 예술작품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작품과 동일시하던 사람들은 이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한 가지 해석만 허용됐던 예술작품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면서 일방적 메시지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대중들은 예술작품을 전혀 다른 맥락이나 목적으로도 사용한다. <모나리자>를 통해 보면,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해 권위를 조롱하기도 하고, 티셔츠나 가방에 인쇄해 상품으로 팔기도 하며, 미용실의 장식품으로 걸어놓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모나리자>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예술인 동시에 마음껏 변형하고 이용할 수 있는 ‘민주적인’ 작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다빈치가 자신의 작품이 이렇게 사용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모나리자>는 아우라를 벗어난 덕분에 어떤 작품보다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사랑받는 작품이 됐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싸이가 노래한 <강남스타일>의 세계적 열풍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강남스타일>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싸이 스스로 자신의 아우라를 붕괴시킨 데 있다. 무대 위 스타의 위치에서 고고하게 관객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무대 밑으로 내려와 스스럼없이 관객과 함께 뛰고 호흡했다. 대중에게 싸이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어려운 ‘스타’가 아니라 같이 어울려 신나게 놀고 싶은 친근한 ‘오빠’다.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따라한 패러디 영상물이 지난 10월 16일 기준 61만 건에 이르러 최단기간 내 최다 패러디수를 기록했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이는 이 음악이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민주적 작품’임을 증명한다.

싸이의 음악을 ‘B급’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여전히 고급과 싸구려를 구분하는 사람들의 낡은 생각이다.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데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고급’으로 분류하고 대중들이 다가설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우라가 쇠퇴한 ‘민주적 문화시대’에 정의롭지 못한 방식이다. 대중들이 가까이 할 수 있고 다양한 의미로 확장시켜 나갈 수 있는 열린 문화 콘텐츠야말로 이 시대가 원하는 ‘민주적’ 예술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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