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성제 기자

 ▲ 이성제 기자

유난히도 추웠던 올 설 연휴, 바깥 날씨가 추운 것과 반비례해 오랜만에 모여 나눈 가족의 정담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은 세상 인심이 야박해질수록 마지막으로 기대는 언덕이요, 세상살이가 고달플수록 달려가 안기고 싶은 안식처가 아니던가?

그러나 설 연휴에도 송전탑 위에서, 성당 종탑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이가 있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법원 판결까지 난 재능교육 노동조합을 인정해달라고 농성을 벌이는 그들의 모습은 설 연휴 동안 오히려 기억에서 사라졌다. 명절 분위기를 띄우는 데 열중한 언론들이 설 분위기를 망칠까 봐 독자와 시청자를 배려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5년의 통치를 마무리해야 할 이명박 정부도 앞으로 5년을 준비하는 박근혜 정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국가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용산참사와 같은 대형 사건은 국가가 오히려 주범이 아닌가? 그렇다면 국가 없는 사회는 불가능할까? 이런 물음들이 잇달아 떠오른 연휴였다.

인디언 사회를 탐구한 프랑스의 정치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국가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문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곳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걱정하기보다 폭력을 앞세운 정치집단의 등장이 큰 골칫거리였다. 집단을 이끈 우두머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재산을 나눠주게 하고 권력 행사기관과 우두머리를 철저히 분리했다. 국가의 본질 중 하나인 폭력 행사가 불가능한 사회였다.

군부 독재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클라스트르가 발견한 사회는 유토피아에 불과해 보인다. 경제발전과 독재를 동반자로 보는 시각은 아직도 남아있다. 강대국 틈에서 발버둥치는 현실과 휴전선 철책도 외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국가 없는 사회’의 꿈이 마을공동체 실험이나 대정부 시위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이유는 국가가 자행한 폭력 때문이 아닐까? 나를 지켜줄 마지막 보루가 오히려 죽을 곳으로 내몬다는 배신감과 분노는 폭력의 오용에서 비롯됐다.

민주주의를 두고 데마고그에 의한 정치라 말한 막스 베버는 정치의 본질에 폭력이 있다고 말한다. 국가 없는 사회를 이룰 수 없다면 적어도 폭력은 사회 정의를 위해 쓰여야 옳다. 저마다 시민을 위한 국가를 얘기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국가 밖에서 벌벌 떨고 있다. 그들을 놔둔 채 ‘새 정치’를 떠벌리는 것은 정의로운 일도 언행일치도 아니다.

국가가 지켜주지 않아 더욱 서러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거리에서, 철탑 위에서 칼바람에 부대끼며 이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다.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는데, 노동자들에게 비극만 되풀이되는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된 걸까? 높은 곳에 오른 사람은 재작년 부산 영도조선소에도, 용산에도,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용산 남일당 망루 위 외침은 크레인과 철탑 위에서 재현됐지만 같은 목소리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들의 외침에 관심을 기울이기는커녕 오랜 투쟁에 짜증을 내는 사람조차 많아졌다. 피의자가 국가에서 자본으로 바뀌고 폭력 행사가 좀더 치밀해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억 너머로 사라질 사건들을 언론이 제대로 붙잡지 못한 이유가 크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조차 외면하는 현장을 누가 오래 기억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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