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신문그림판 대신 마을운동 이끄는 박재동 화백

청년 시절의 그는 질곡의 현대사를 기록했다. 펜이 아닌 붓과 물감으로. 곳곳에서 최루탄이 터졌고 학생들은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까지 감행했다. 그는 그 처절한 현장을 기록하고 알려야 했다. 19805.18 광주항쟁을 계기로 그가 민중미술 운동에 뛰어든 것도, 19885월 국민주로 탄생한 <한겨레>의 첫 만평가가 된 것도 민주화의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 시사만화의 역사는 박재동 화백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박다영

청년 박재동, 망치 대신 붓을 들다

연일 최루탄이 터지고 학생들은 분신하고 민주화 투쟁 열기는 날로 높아져 갔어. 이때 일부 예술가들은 사회와 예술이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민중미술그룹이 탄생했지. ‘민족미술협의회나 내가 속했던 현실과 발언같은 동인도 만들어졌어.”

지난 6일과 지난해 6월 두 차례 <단비뉴스>의 인터뷰에 응한 박재동(61·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화백은 30여년전 청년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민중미술의 모태가 된 화가집단인 현실과 발언을 비롯해 '두렁', '서울미술공동체등의 동인은 사회 개혁을 꿈꾸며 각자의 예술적 재능을 현실에 접목했다. 그들은 때론 붓 대신 끌개, 망치 같은 연장을 쥐고 노동 현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박 화백은 만평으로 세상에 비판적 칼날을 들이대기 위해시사만화가의 길을 택했다.

▲ 1988년 5월 15일 <한겨레> 창간호 만평. ⓒ한겨레

그가 1988515<한겨레> 창간호에 그린 만평은 다윗과 골리앗이었다. 민중을 상징하는 다윗이 부패한 군부독재를 상징하는 거대한 골리앗을 돌팔매질로 이겨내는 모습에 자신의 염원을 담았다.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한겨레그림판'을 그렸고, 8년이라는 세월동안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3명의 대통령이 이끌어 간 한국 정치와 사회에 돌팔매를 날렸다. 시인 황지우는 '권력에 대한 웃음-박재동 만화 아이콘 분석'이라는 글에서 박 화백의 그림을 '풍자 예술의 백미'라고 평했다.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웃음을 예술적으로 포장해 권력의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그의 표현방식은 독창적이면서 독보적이었다. 박 화백은 그러나 19966월 돌연 '한겨레그림판'을 떠났다.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부 세력에서 문민정부인 김영삼으로 넘어오면서 민주화 운동이 진척됐다고 생각했어. 물론 김영삼 정부는 노태우와의 합작으로 탄생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완벽한 민주화는 아니었지만 이전 군부 정권과는 확실히 달랐지. 민주화 운동을 위해 만평을 시작했으니 내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거야. 매일 만평을 그리다보니 밑천이 떨어지기도 했고.”

▲ 정확히 20년 전이지만 지금의 검찰 모습과 다를바 없다. ⓒ한겨레

거리 속 이야기를 담아낸 손바닥아트

그렇게 떠나 대학교수 등으로 자유롭게 살던 그가 다시 신문지면으로 돌아온 건 2009년이다. 한 주에 한 번 <한겨레>에 한 뼘 크기의 '손바닥아트'를 선보였다. 일반적인 만평이 날카로운 공격성과 풍자성을 강조한다면 그의 손바닥아트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아픔을 함께 드러냈다. 지하철이나 택시, 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이들의 사연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민심의 바로미터'라 불리는 택시 기사와의 유쾌한 수다, '학교는 재미없다'는 여덟 살 아이의 뚱한 표정, 동네 슈퍼 주인의 한숨 등을 통해 서민의 신산한 삶과 교육의 문제를 꼬집었다. 때로는 영수증, 현금입출금기(ATM)의 거래명세서, 길거리 홍보물 '찌라시'도 화폭으로 변신했다. 잔고 숫자 옆에서 한숨을 쉬는 초상화가 가난한 서민의 마음을 대변했고, 대리운전, 일수, 성인광고 위로 길게 그림자 진 남자의 모습이 구석에 몰린 사람들의 암담한 처지를 웅변했다.

시사만평은 구체적인 한 사안을 매일 매일 그려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손바닥아트는 일주일에 한 번이고,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보단 좀 더 숙성시켜다룬다는 점이 좋았지. 정서적인 느낌도 많이 담아낼 수 있고.”

▲ '손바닥아트' 표지를 장식한 이 빠진 소녀와 매일 마주치는 과일 노점상 아저씨. ⓒ박재동 '손바닥아트'

거리에서 만난 이들의 모습에서 시작된 손바닥아트는 박 화백의 화첩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시민들이 쉽게 예술을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공중 화장실에서 전시회를 연 것이 어느덧 3년째다. 화장실 문화를 바꾸겠다는 코레일의 노력과 맞물려 가장 긴요하고 일상적인 공간인 화장실이 '갤러리'로 변했다. 코레일 부천역과 서울 구로구청 화장실, 인사동 초입을 비롯해 전국의 다양한 공공장소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하루는 부천역장에게서 전화가 왔어.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행복해 한다고. 하루아침에 갤러리 직원이 됐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다시 국민의 공포와 죽음이 이어지는 현실

'민주화가 진전됐으므로 시사만평을 떠났다'고 말했던 그가 다시 손바닥아트로 돌아온 것은 그 시점에서 민주화가 후퇴했다고 생각한 까닭일까. 그는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하진 않았지만 이명박 정부가 국민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말로 대신했다. 경제발전을 바란 국민들의 열망이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재벌 등 대기업만 승승장구하는 현실과 갈수록 양극화되는 삶, 그 와중에 벌어진 민간인 사찰 등은 자칫하면 나도 당할 수 있다는 불안함을 높였다. 박 화백은 "언론까지 장악해서 정부와 반대되는 목소리는 내지 못하도록 하는 정부가 어디 있냐"고 비판했다.

박 화백은 이명박 정부 들어 이어진 노동자들의 비극에 특히 마음이 쓰였다고 한다. 정리해고자와 그 가족 등 23명이 자살, 병사 등으로 목숨을 잃은 쌍용차 사태는 20098월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 화백은 지난해 5'쌍용차 추모 문화제'를 찾기도 했는데, 수많은 사회 문제 중에서도 쌍용차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은 죽음이 결부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23명이 죽었어. 하지만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만 전가하고 회사는 복직시켜주겠다던 약속을 저버렸지. 파업에 참여했다고 경제적으로 옥죄기 위해 벌금형을 내리고 손해배상을 청구해. 처음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는데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다 외면해. 가족도 떠나가고. 돈 없는 이들은 차라리 감옥 가는 게 나아. 재취업은 어디 쉬워? 쌍용차 출신이라 하면 받아주지도 않는데. 다들 살 길이 없어 말라 죽고 있어.”

최근 회사측이 무급휴직자 복직 결정을 내리면서 상황이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비치지만 복직되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은 여전하다. 그래서 돌아가는 자들의 발걸음도 무겁다. 박 화백은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사회 기금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부조하는 것처럼 적은 돈으로 돕는 건 모두가 할 수 있잖아. 이건 오로지 죽음을 막기 위해서야."

마을 공동체는 이 시대 민주화의 한 기둥

그는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의 사랑방이자 치유공간이 되고 있는 '와락'센터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추진했던 '가고 싶은 학교 만들기' 정책 자문위원으로 일했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을공동체' 사업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 성남문화재단에서 '마을에서 예술로 놀다'라는 주제로 열린 아카데미 강연 중인 박재동 화백. ⓒ성남문화재단 동네만들기지원센터 사랑마루
마을공동체는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마을’, 강북구 우이동 삼각산재미난마을처럼 마을 주민들이 손을 맞잡고 공동육아로 아이를 키우고 먹을 것을 나누는 대안적 도시공동체다. 서울시는 지난 422개 사업에 222억 원을 투입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육아, 안전, 일자리, 아파트 관리비 등 생활 현장의 문제를 주민들이 함께 고민하고, 작은 도서관, 마을예술창작소 등을 공동체 활동의 거점으로 만든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박 화백은 행복한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다양한 문화적 상상을 돕는 강의를 맡았다. 지난해 12월에는 서대문구 마을공동체 '꿈틀'에서 '아이들이 행복한 마을'을 주제로 강연하기도 했다.

그는 "도시에서도 주민들이 직접 마을을 만들어 보면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게 되고 공동체 문화도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어린이, 청소년도 마을 만들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뛰어놀 공원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때로는 어른들의 틀에 갇힌 발상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는 이렇게 아이, 어른이 어울려 바람직한 마을을 만드는 것, 공동체 문화를 회복하는 것이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민주화의 또 다른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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