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혜인 기자

▲ 김혜인 기자
지난해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2년 만에 귀국한 내게 친구들은 맨 먼저 ‘카카오톡’ 아이디를 물었다. 카카오톡이 없으면 연락하기도 힘들다며 빨리 스마트폰을 마련하라는 성화에 나는 귀국 사흘 만에 스마트폰을 사고 즉시 ‘카카오톡’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았다.

카카오톡을 써보니 왜 친구들이 이 메신저 시스템에 열광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카카오톡은 글자 제한이 없으면서도 무료 서비스였다. 일대일 채팅뿐 아니라 여럿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그룹 채팅 기능도 있어 많은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기도 쉬웠다. 카카오톡은 모바일 세계 속의 거대한 광장이었다. 얼굴만 맞대지 않았다 뿐이지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고 흩어지는 사이버상의 아고라였다.

그러나 이토록 편리한 카카오톡이 내 일상을 깊숙이 차지하는 것을 넘어 어느새 내 삶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핸드폰에는 지난밤 도착한 메시지가 대개 백 건 넘게 쌓여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고,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오가는 대화에 참여하느라 핸드폰만 붙들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한 번 메시지를 확인하면 수신확인이 되는 기능 때문에 답장을 미룰 수도 없었다. 무료에 글자수 제한이 없는 친절한 서비스 덕분에, 카카오톡은 그야말로 온갖 이야기들의 잡동사니가 되었다.

광장에서 수도 없이 마주치는 의미 없는 사람들처럼, 오늘 내가 내뱉은 많은 말들 또한 순간 순간의 재미를 충족하곤 의미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종일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서도 하루가 지나면 대부분 기억할 수 없는 이 공허한 이야기들이 허무했다. 카카오톡이라는 사이버 광장 속 군중들 틈에서 나는 나 개인의 삶을 잃어버리고 홀로, 고독하게 서 있는 기분이었다.

작가 최인훈은 소설 <광장>에서 말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나는 살기 위해 카카오톡이라는 광장으로 나섰지만, 동시에 나만의 밀실을 잃었다. 광장에 가둬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나의 심신은 점점 피폐해졌다. 이 집단적 공간에서 한 걸음 물러나, 홀로 사고하고 의미 있는 언어를 찾고 싶다는 열망이 내 안에 솟구쳤다.

결국 카카오톡을 없앴고, 몇 달이 지난 지금 금단현상도 사라져 나만의 일상을 되찾았다. 노예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월든 호숫가에 스스로 집을 지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버지니아 울프처럼, 나는 카카오톡 광장에서 물러나 나만의 밀실을 찾았다. ‘대중의 밀실’에서 벗어나 ‘개인의 광장’을 찾음으로써 나는 자유로워졌다. 인스턴트 언어의 해방구에서 벗어나 책임감 있는 언어의 공간을 되찾았다. 나의 삶을 되찾으면서 나는 좀 더 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나만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친구들은 카카오톡 없이 사는 내게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한다. 없애고 보니 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왜 이토록 카카오톡에 매달리는 걸까? 사람들에게는 카카오톡을 없애면 이 거대한 세상에 홀로 남겨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듯하다. 인간이 이토록 사랑을 갈망하는, 고독에 나약한 존재였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은 우리에게 카카오톡이 단 하나뿐인 광장이라는 착각에서 기인한다고 말하고 싶다. 카카오톡이 유일한 광장은 아니다. 카카오톡을 없앤 나에게 문자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한 연락 수단이고, 더 풍부한 감정과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전화도 있다. 끝 모를 정도로 다양하게 진화한 이 모바일 시대에, 만남이 이루어지는 아고라가 단 하나뿐이라는 생각은 너무 편협한 게 아닐까? 나는 비록 하나의 광장을 떠났지만, 좀 덜 북적대는 다른 광장으로 옮겨 인간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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