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정희준 동아대 교수 주제①: 탈근대의 스포츠 민족주의

“국위선양한 한국인 하면 누가 떠오르나요?”

▲ 정희준 교수는 한국 스포츠계가 민족주의에 힘입어 번창해왔다고 말했다. ⓒ 허정윤

정희준 동아대 교수의 질문에 학생들이 ‘피겨 여왕’ 김연아를 시작으로 김일, 손기정, 반기문, 차범근, 싸이, 박태환, 박세리까지 많은 이름을 들었다. 대부분 스포츠 스타였다. 정 교수는 “사람들이 스포츠에 미칠 때 민족주의가 분출된다”며 스포츠계가 민족주의에 힘입어 번창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탈근대의 스포츠 민족주의’를 주제로 강연하면서 “어느 사회든 민족주의가 존재하지만, 우리나라는 특히 스포츠에서 민족주의가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민족주의의 반이성적 성격
 

정 교수는 민족주의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데올로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의식이나 가치관이라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그는 이데올로기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이데올로기가 기존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념과 태도라는 이야기다. 민족주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 현상 중 하나로 유럽에서 시작됐다. 신을 숭배하는 경향이 줄고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인쇄매체의 발달도 민족주의 형성의 계기가 됐다. 
 
정 교수는 미국 코넬대 베네딕트 앤더슨 교수의 책,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를 소개하며 민족주의를 설명했다. 앤더슨은 민족주의가 엘리트 집단의 ‘창조물’이며 계급갈등을 차단하기 위한 도구로 보았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희생이 강요됐다. 특히 전체주의는 강력한 정치도구로 이용됐고, 파시즘 득세의 원동력이 됐다.

지배집단이 만들어낸 애국주의는 사람들이 전쟁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다. 민족을 중시하는 문화는 나라를 위해 '한 몸 던지는' 수많은 애국주의자를 쉽게 양산했다. 태평양전쟁 역시 민족주의와 관련있다. 미국이 일본으로 들어가는 유류를 차단하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정 교수는 경제적 억압과 민족주의가 만나 일어난 태평양전쟁이 경제민족주의의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인 칼 포퍼는 "억압, 폭력, 전쟁 등의 재앙을 불러오는 민족주의는 인류악이며 우리로 하여금 불관용, 공동체 이기주의, 오만한 조국애, 인종우월주의 대량학살을 정당화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할 ‘열린 사회’가 민족주의의 반이성적 성격과 편견에 가로막혀 있다는 포퍼의 말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 베네딕트 엔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에서 번역되었다. 한국판 표지에서만 '붉은 악마'로 대체된 것을 볼 수 있다. ⓒ 정희준

비장했던 민족주의에서 쾌락적  민족주의로
 
정 교수는 먼저 민족이란 개념이 성립되기 위한 전제로 고유영토와 자율성, 적대적인 주변 환경과 전쟁의 기억을 꼽았다. 그는 “공공의 적과 전쟁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민족을 상기시키는 대용품이 바로 스포츠”이며 “월드컵과 같은 국제 경기야말로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는 이벤트”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왕과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면 지금은 자본을 얻기 위해 살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민족주의를 비교하기 위해 프랑스 화가 유진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을 예로 들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는 ‘적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에 넘치게 하라’는 소절이 있는데, 과거 민족주의가 얼마나 비장하고 저항적인 성격이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민족주의는 끊임없이 공공의 적을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이데올로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역할이 달라졌다. 정 교수는 민족주의가 20세기에는 민족 중심의 정치‧사회적 동력이었다면 지금은 이윤 중심의 경제적 동력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건하고 비장했던 민족주의는 쾌락적이고 육감적인 민족주의로 변모했다.

“민족주의는 20세기 파시즘의 중심에서 대중에게 희생을 강요했고, 21세기에 들어서는 고객에게 소비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초래했습니다”

 정 교수는 민족주의가 시대 흐름에 따라 진화했음을 강조하며 21세기 민족주의는 마케팅의 도구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스포츠 판타지에 빠진 '대~한민국'

정 교수는 우리나라만큼 독특한 스포츠 문화를 가진 나라는 없을 것이라며 흥미로운 사진을 제시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는 많은 나라에서 번역됐는데 대부분 원저와 같은 사진이 표지에 실리거나, 간단히 제목만 바뀐 채 출간됐다. 반면 한국판 표지로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사진이 쓰였다. 사진 속 붉은 악마들은 마치 하나가 된 듯 빨간 티셔츠를 맞춰 입고 두 손을 번쩍 든 채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정 교수는 단편적이긴 하나, 책 표지만 봐도 우리나라에서 스포츠가 얼마나 민족주의를 강하게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스포츠 민족주의가 독일 나치즘이나 이탈리아 파시즘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체주의 징후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봤다.

"월드컵 경기장과 서울시청광장을 가득 메웠던 붉은 악마의 응원이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나치 친위대와 무서우리만치 흡사하지 않습니까? 이는 결코 비약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 정 교수는 붉은 악마의 응원이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나치 친위대와 흡사하다고 강조했다. ⓒ 허정윤

정 교수는 이런 현상을 두고 매우 ‘한국적’이라는 표현을 잊지 않고 덧붙이면서 그 원인을 역사에서 찾았다. 정 교수는 우리나라 민족주의의 출발점을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봤다. 서구 세력이 침입하여 나라가 흔들리고, 급기야 국가가 없어지는 사태를 겪으면서 일종의 콤플렉스(열등감)가 생겼다고 정 교수는 진단했다. 스포츠는 ‘국가를 잃은' 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콤플렉스를 떨쳐버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은 ‘강한 조선인’의 표상이 되었다.

“나라가 사라지면서, 강한 민족에 대한 열망이 생겨났습니다. 또 힘이 없는 상황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뭉쳐야 산다’는 단합의식이 필요했죠. 서구인보다 왜소한 체구는 외모, 특히 ‘롱다리’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콤플렉스는 비교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의 비교대상은 일본과 서양이었다. 콤플렉스를 해소할 만한 소식은 자연히 독자들에게 주목 받기 마련이다. 스포츠라고 예외는 아니다. 서양인들과 대등하게 몸을 부딪히고, 좋은 성적을 거두는 선수들을 통해 콤플렉스가 대리 해소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상을 해외 언론을 통해 전달하는 기사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네가 아는 선수는 단순히 한국 선수가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정하는 대단한 선수다”라고 ‘증명’해주는 것이다. 정 교수는 “1차로 성적을 보여주고, 2차로 외국 반응을 보여주어 두 차례에 걸쳐 열광하는 ‘중층열광’ 형태”라고 풀이했다.

‘두 날개’를 단 한국 스포츠

스포츠는 해방 후에도 국민이 단결하는 데 ‘국가 장치’의 역할을 보란 듯이 해냈다. 대한민국에서 스포츠 경기에 이기는 것은 국가의 승리로 여겨졌다. 스포츠는 단순 오락을 넘어 한국인에게 애국심과 자신감을 동시에 드높여 주는 매개체였다는 이야기다. 박정희 정권 당시 문교부가 저조한 성적을 낸 선수들에게 ‘국위를 손상했다’는 이유로 자격을 정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체력은 국력’임을 강조했던 정권이었지만, 이는 스포츠의 본질이 이데올로기에 훼손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70년대가 스포츠로 ‘애국지사’가 되던 시절이었다면 80년대부터는 미디어와 함께 스포츠 ‘스타’가 나타났다. 88올림픽을 준비하던 5공화국은 ‘스포츠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개월 만에 졸속 출범한 프로야구는 독재정권에 고통받던 대중에게 마취제가 되었다. 정 교수는 독재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프로야구로 달래게 하려는 속임수를 부렸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국민이 프로야구에 도취된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자로 나서서 공을 던지고 있다. ⓒ KBO

정 교수는 강의 첫머리에서 던진 질문을 미국에서 하면 다른 답변을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도 영웅은 만들어진다. 다만 그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영웅의 종류는 우리나라와 달리 아주 다양하다는 것이다. 경찰관, 소방관, 선생님은 물론, 옆집 아저씨 아주머니도 영웅이 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영웅들은 국위선양을 한 운동선수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특히 세계무대에 나가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그 대상이다. 백인 선수들이 유리한 종목에서 우승한 한국 선수들은 영웅 중의 영웅이 된다.

정 교수는 박태환과 김연아가 대표적인 선수들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박태환과 김연아는 우리 국민 대다수가 갖지 못한 ‘긴 팔과 긴 다리’의 소유자였다. 정 교수는 현재 한국 스포츠는 ‘상업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날개를 가지고 비상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김연아는 빙상장에서도 ‘퀸’이지만 미디어에서도 ‘퀸’ 대접을 받았다. 정 교수는 ‘섹시 민족주의’가 적용된 사례라며, 한국의 스포츠 민족주의는 실력만큼이나 외모가 중시되는 사회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후진적 민족주의는 차이를 우열과 선악으로 재단

이렇듯 스포츠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민족주의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다문화 사회로 접어드는 시점에, 오히려 단일민족 정체성을 강조해서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고 정 교수는 지적했다.

“민족주의는 ‘차이’를 ‘우열’로 보기 시작해서 ‘선악’까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극단적으로 열등한 민족을 ‘없어져야 할 존재’로 규정한 세력도 있었죠. 전국민이 같은 생각을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나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통합만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그 사회 안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희생을 강요하기 마련입니다.”

정 교수는 이런 지나친 민족주의를 ‘후진적 민족주의’라고 불렀다. ‘선진적 민족주의’가 자유, 평등, 인권 등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을 강조하는데 반해, 후진적 민족주의는 통합과 희생을 강요한다. 그 결과 민족주의는 한 사회 내의 차이를 폭력적으로 제거한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스포츠 민족주의가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설명된 것 같은데 장점은 없느냐"는 질문에 정 교수는 스포츠에도 ‘이중성’이 존재한다고 대답했다. 정 교수는 스포츠의 부작용이 극대화할수록 새로운 세계관도 유입된 바 있다며 스포츠 민족주의의 긍정적인 부분을 인정했다. 88서울올림픽 전후로 32개 공산국가와 본격 교류를 시작했고 한국 축구 특유의 민족주의 정서 덕에 90년 남북통일 축구대회가 열렸다. 이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으로도 이어졌고, 남북단일팀 구성까지 이루는 결과를 낳았다.

2002년 2월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일어난 ‘안톤 오노 사건’은 4개월 뒤 열린 한일월드컵 때 한국인들이 미국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한일월드컵 중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미선이 효순이 사건’은 반미 감정의 정점을 찍으며 또 한번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았다. 정 교수는 학생들에게 한국 스포츠 민족주의와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환상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스포츠 자체를 즐기고 이를 통해 ‘인간됨’을 회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이주헌, 이권우, 한홍구, 장승구, 김진석, 신형철, 정희준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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