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다영 기자

▲ 박다영 기자.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닮은 강은 깊고 낮은 곳으로 하염없이 흐른다.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춘삼월에도, 낙엽이 물 위에 떨어지는 구시월에도 쉬지 않고 흐른다. 대지가 달아오르는 한여름에도, 눈발이 흩날리는 세모에도 강은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때로는 불어난 물이 한 해 정성을 쏟은 농사를 망쳐도 사람들은 그 곁을 떠나지 못한다. 이마에 밭고랑처럼 깊게 주름진 한 노인은 ‘먹고 살만큼만 부치면 되는겨’라며 자족한다. 강변에서 평생 땅콩을 심고 캐며 구부정해진 허리는 그가 손에 쥔 호미를 닮았다.

섬의 생김새가 길쭉한 주머니를 닮아 ‘조마이’라는 이름이 붙은 모래톱에는 한때 보리가 허리춤까지 자라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몇 천년 갖은 풍상과 홍수를 겪는 동안 모래가 밀려와 만든 모래섬에는 수박이며 땅콩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 속 조마이섬이 바로 을숙도(乙淑島)다. 

을숙도와 섬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만큼 기구한 운명을 지닌 곳이 또 있을까? 을사늑약 이후 시작된 ‘조선 토지조사사업’으로 별안간 모든 농토가 국유지로 둔갑했고 6.25 전쟁 때는 그곳에 터잡고 살던 사람들마저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먹고 살만해진 뒤에는 국회의원 같은 권력자나 하천부지 매립허가를 받은 지방 유지들까지 모래톱 사람들을 위협했다. ‘똥’ 처리를 위해 분뇨장이 만들어졌고 흐르는 물길의 허리를 잘라 길을 내고 하구둑을 만들면서 ‘을숙도 똥다리’라는 말도 생겼다. 뒤이어 쓰레기 매립장까지 들어섰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섬’이고 ‘새들의 낙원’이란다. 파괴된 생태계를 4대강사업으로 복원했단다. 떠났던 철새도 다시 모여들 것이라며 전망대까지 만들었다. 겨울에 찾아간 을숙도는 더욱 스산했다. 언뜻 보면 우거진 갈대숲은 하늘과 땅의 축복을 고스란히 받은 땅처럼 보인다. 갈대숲과 전망대는 그런대로 어울리는 듯하다. 하지만 잘려나간 갈대숲과 버드나무 군락 대신 들어선 것은 휑한 잔디밭이다. 쑥쑥 보기 좋게 순과 잎을 뽑아 올리던 갈대청은 온데간데없다. 제 몸 내던져 조마이섬을 지켰던 갈밭새 영감이 이 광경을 봤다면 어떻게 호통칠까? “쥑일 놈들.” 

소설 속 <모래톱 이야기>는 조마이섬에 군대가 정지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끝난다. 지금 모래톱은 누가 점령했을까? 군대 대신 개발업자들? 아니면 아이 손잡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 문득 이름 모를 새가 놀란 듯이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새들에게도 이곳은 이미 점령지가 아니다. 

강물이 상류에서 모래를 날라와 섬을 만들던 것도 이제 소설 속 옛 얘기일 뿐인가? 낙동강 곳곳에 보가 생기면서 강물도 힘을 잃었다. 강은 ‘누구의 잘못이냐’고 묻고 있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강물도 말없이 흘러갈 뿐이다. 어느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모래인지 서로 묻지도 않으면서 여기 을숙도에 이르러 ‘제2의 고향’을 만들던 모래들의 이야기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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