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양승희 기자

▲ 양승희 기자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책 제목 앞에 나는 꼼짝없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직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해본데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내게 ‘지금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선고는 가슴을 찌르듯 아프게 다가왔다. “형량을 따지면 나는 무기징역 감”이라는 친구의 농담에 그저 웃어넘기려 했지만, 우리는 왜 그 흔한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인가 싶어 못내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의 수많은 이삼십대 젊은이들은 ‘사랑’이 어려워 세 가지를 포기했다. 그리고는 ‘삼포(三抛) 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치솟는 물가에 등록금, 취업난, 집값, 양육비 등 무엇 하나 녹록치 않은 사회·경제 상황은 젊은이들에게 연애부터 결혼, 출산까지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은 남보다 더 빨리 더 높게 성장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며 젊은 세대의 등을 떠민다. 반면 시간도 돈도 없는 자들에게 ‘사랑은 참아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며, 연애, 결혼, 출산은 출세하거나 배부른 놈이나 할 수 있는 ‘사치’라고 규정짓는다. 사랑을 억압하는 사회 풍조에 젊은 세대는 별로 저항하지도 불편해하지도 않는 듯하다. 등록금, 취업난, 집값 등 고통은 이 세대가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으로 인정한 뒤 체념한 듯 사랑을 포기해 버린다. 이들은 마치 사디스트에 해당하는 세상에 복종하며 자학하는 매저키스트 같다. 상황을 바꿔보기 위해 저항하기보다 주어진 고통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무기력함마저 느껴진다.

돈, 외모, 직업 등 ‘조건’을 앞세우는 사회 분위기가 ‘감정’에 충실한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부분도 있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사랑에 빠지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포 세대는 사회가 부추기는 대로 경쟁이나 업무에만 몰두할 뿐 사랑은 억눌러 버리거나 자발적으로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사회라는 초자아의 억압이 너무 크기에 사랑의 욕망을 제거해 자아를 축소하는 쪽으로 생존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사랑을 시작해봐야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 지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탓에 깊게 빠지려 들지 않는다. 상대방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감정 노출을 자제하는 사랑은 어느 정도 이상 깊어지지 않는다. 결국 서로에게 ‘사소한 존재’로 남은 채 사랑이 끝나고 만다. 서로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는 이성 관계는 상처를 남기지 않고 끝나지만, 역설적으로 작은 상처에도 취약한 상태가 돼 사랑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한 번도 열정적이지 않은 사랑은 늘 미지근하게 끝나고, 꿈꾸던 사랑의 환상이 깨지며 불신만 더욱 깊어간다.
 
남을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신만의 사유를 가지려 했던 중국 철학자 이지(李贄)가 지금 삼포 세대의 사랑을 본다면 아마 따끔하게 꾸짖을 것이다. 세상 앞에 굴복해 고유한 사랑을 포기한 데 대해 실망할 테니까. 그는 인간이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매번, 매 순간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잔혹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잔혹성'이란 인간을 억압하는 실체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에 굴복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아무리 세상이 사랑을 억누르라고 말할지라도 이에 대항하여 ‘자신의 것’인 사랑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항할 힘이 없다고 무기력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상대를 물고 살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놓지 않는 잔혹성을 보일 때 사회는 개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나를 억누르는 고통에 길들여지지 않고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아프도록 주시하고 힘껏 저항해야 한다. 사랑을 막는 사회에 맞서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방법은 사랑의 주인이 되어 마음껏 격렬하게 사랑을 표출하는 것이다. 사랑함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장애물 앞에 선 삼포 세대가 누군가 사랑할 수 있는 마음마저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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