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영동 1985> 박원상, "왜 공포를 조장하냐고? 공포 너머를 기억하자고"

▲ 영화<남영동1985>에서 김종태 역의 배우 박원상이 8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를 촬영하면서 느꼈던 소감 및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 이정민

88학번, 청파동에서 30년 동안 지내며 자라고 컸단다. 배우 박원상에게 '남영동'은 지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영화 <남영동 1985>(이하 '남영동') 관련 인터뷰를 통해 만난 박원상은 남영동에 얽힌 과거의 기억부터 꺼내놓았다. 이미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영동>이 상영됐을 당시 다른 배우들과 함께 가슴 먹먹했던 순간을 지났던 그였다.

"그런데서 나고 자라고 대학로에 가서 직업배우가 됐지만 제 기억엔 그곳, 남영동이 없었던 거죠. 영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나요.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인터뷰를 하지만 제가 출연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참 낯부끄러운 거거든요. 영화 홍보에 대해 배우가 할 일을 저 역시 잘 알지만 이번엔 그냥 영화를 하며 마음에 스쳤던 생각들, 기억들을 조각모음 하고 있어요."

▲ 영화 <남영동 1985>의 고문 장면. ⓒ 아우라픽쳐스

<남영동 1985>의 김종태, 그 역할 만큼 힘들었던 당시 상황

<남영동>은 2012년 박원상에게 크나큰 무게감이었단다. <부러진 화살>때 연을 맺게 된 정지영 감독의 차기작이라 한달음에 출연의사를 밝혔고, 함께 한 이들이 명계남, 이경영, 김의성 등 출중한 배우들이었지만 말이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삶을 담아내야했던 부담감, 시대에 대한 부채감이 영화 이상의 무게로 다가왔던 것이다.

"부산영화제 기자 간담회 때 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는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더라고요. 제 몸에서 방어기제가 나온 거였어요. 촬영 당시의 기억을 스스로 저도 모르게 잊어갔던 거죠. 그 기억을 다 갖고 있으면 견딜 수 없으니 그랬던 거 같아요."

<남영동>의 기억은 그의 차기작에도 영향을 줄만큼 강했다. 곧 개봉할 이환경 감독의 영화 <12월 23일>을 <남영동> 촬영이 끝나고 바로 들어가야했지만 박원상의 상태가 여의치 않았던 것.

"<12월 23일> 촬영장에선 왕따 아닌 왕따였어요. 이환경 감독님과는 <챔프>도 같이 했고 친한데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남영동>을 찍고 나면 도저히 이 영화는 못할 거 같으니 이번엔 빠질게요'라고 말이죠. 민폐였죠. 이환경 감독이 그러지 말고 하자고 절 설득하셨어요."

▲ 영화<남영동1985>에서 김종태 역의 배우 박원상이 8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를 촬영하면서 느꼈던 소감 및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 이정민

<남영동 1985> 박원상에겐 기억에 대한 영화

박원상은 <남영동>에 대해 '기억에 대한 영화'라고 표현했다. 김근태 상임고문을 빗댄 김종태는 당시 권력의 무자비함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박원상은 "그들이 받은 고문을 정면 응시하는 영화면서도, 용서를 얘기해보려는 영화인 동시에 내겐 기억에 대한 영화"라고 재차 강조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정지영 감독님이 강하게 끌어와 관객들과 만나게 하려고 했던게 아닌가 생각해요. 불편하고 힘든 사실이지만 그럴수록 기억해야 한다면서 말이죠.  2002년 월드컵 당시 시청광장에 대한 흥분과 환호의 기억은 잊을만하면 매스컴에서 짚어주는데 20년 전 6월 항쟁은 그렇지 않아요. 수많은 학생, 직장인, 남녀노소가 거리로 나왔던 그땐 물론 훨씬 과거의 일이지만 요즘 거의 나오지 않고 있는 현실이죠.

과거 이야기를 꺼내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목표가 있는데 왜 굳이 과거를 꺼내냐고들 하죠. 지금 우린 그때의 공포에서 벗어나있지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됐을 때 다시 과거로 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남영동>에 대해 판단하는 건 개인의 몫이지만 참여했던 배우로선 특정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분명 어떤 이들은 불편해 할 것이다. 즐겁게 살기에도 바쁜 인생인데 <남영동>같은 영화를 굳이 봐야하는지 반문하며 말이다. 같은 질문을 배우 박원상 역시 염두하고 있었다.

"왜 당신들은 고문이라는 소재에 카메라를 들이대서 공포를 조장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이유는 분명하거든요. <남영동>은 공포 영화같은 장르영화가 아니기에 그 공포 너머에 있는 걸 공감하고 기억하고 생각하자는 영화입니다.

물론 보기에 힘들 수 있지만 가능한 많은 분들이 와서 정면응시하며 버텨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관객들이 시간과 돈을 내면서 감상하는 게 영화기에 분명 <남영동>은 그런 부분에서 핸디캡(불리함)이 있죠. 그래도 관심이 생기신다면 꼭 극장에 찾아오셨으면 해요."

▲ 영화<남영동1985>에서 김종태 역의 배우 박원상이 8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를 촬영하면서 느꼈던 소감 및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 이정민

"잃어버린 우리 현대사를 위한 교과서로 남길"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었다. 박원상은 진중한 표정 가운데서도 "인터뷰 사진을 찍을 때 마다 꼭 영화를 보러 오라고 염력을 쏘고 있다"며 재치를 보였다. '염력'이라고 쓰고 '진심'이라고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남영동>은 우리가 차마 담지 못한 현대사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사는 필수로 배우지만 현대사는 그렇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정말 필요한 역사 교육은 현대사가 아닐까. 초등학교 2학년, 중학교 2학년의 두 아들을 둔 박원상에게도 분명 같은 생각일 거란 짐작이 있었다.

"가르쳐줘야죠. 우리의 선배들이 부끄러워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우리가 시험을 보면 다음에 틀리지 않기 위해 오답노트를 만들잖아요.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게 좋지만 저 역시 성인이 돼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가 있더라고요. 잊을만하면 '야! 정신차려' 이래야 할 것 같아요.

언론이든 문화든 과거의 실수를 짚어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문제가 있는데 그게 쌓이면 결국은 곪고 터지잖아요. 어떻게 사는게 좋은 인생인지 생각하려는 여유와 관용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렇다고 먹고 사는 문제를 등한시하자는 게 아닙니다. <남영동>을 하기 전까지 회색분자에 가까웠던 저 역시 당장 삶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삶에 대해 생각하고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느꼈듯이 말이죠."

그래서였을까. 박원상은 중학생인 아들을 극장에 데리고 가서 영화를 본 후 얘기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여러 차례 밝혔다. <남영동>이 15세 이상 관람가를 받은 만큼 학생들도 영화를 볼 기회가 생긴 건 그에게도 다행한 일이었다.

"어린 친구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알던 선생님들에게 안하던 전화를 돌렸는데 아이들이 많이 좀 볼 수 있게 시말서를 쓰지 않는 선까지 좀 말씀해달라고 부탁도 드렸어요. (웃음) 아이들은 속도에 떠밀려 사는 어른들의 모습을 습자지처럼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방황하고 힘들어 한다고 전 생각하거든요.

<남영동>을 통해 아이들이 근현대사를 알기보단 공포라는 게 뭔지 직간접적으로 느꼈으면 좋겠어요. 어떤 친구에게 해를 가하려다가도 그가 공포에 질려있구나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포에 대한 공감 이후 학생들이 책을 뒤지든 인터넷을 찾든 과거 선배들이 살던 때의 일을 자발적으로 궁금해 하고 학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 이 글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 이선필 기자가 <오마이스타>에 보도한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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