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장승구 세명대 교수
주제②: 서애 류성룡의 재인식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2시, 노량 관음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은 왜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류성룡이 영의정에서 파직돼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순신은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던 것일까? 이순신과 류성룡은 어떤 관계였을까?

▲ 장승구 세명대 교수가 '서애 류성룡의 재인식'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 손지은
이순신과 류성룡은 서로 존경하는 ‘절친’

장승구 세명대 교수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에서 ‘서애 류성룡의 재인식’을 주제로 강의했다. 장 교수는 이순신을 알면서 류성룡은 잘 모르는 현실을 아쉬워했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을 발탁해 최전방의 요직을 맡기는가 하면 전쟁이 터지자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동양3국의 국제전을 잘 이끌어 조선에 승리를 안긴 난세의 정치인이었다. <징비록>(懲毖錄)은 그가 겪은 임진왜란의 기록서이다.

장 교수는 류성룡이 뛰어난 학자이자 리더였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강의하면서 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을 ‘위대한 만남’이라 표현했다. 1542년에 태어난 류성룡은 이순신보다 세 살이 많을 뿐이었다.

“이순신과 류성룡은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잘 알고 지낸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순신은 류성룡을 굉장히 존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순신이 신경을 써서 쓴 편지가 있는데 수신자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류성룡일 가능성이 큽니다. 임진왜란 직전에 서애는 이순신을 7계급이나 특진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합니다. 그는 전쟁에 대비하라고 이순신에게 책도 많이 줍니다. 최신 병법서 같은 것들이죠.”

▲ 류성룡이 임진왜란 전후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 한국학중앙연구원
그가 쓴 <징비록>에도 이순신이 자주 등장한다. 이순신의 승전 소식을 상세히 다루는가 하면, ‘국란을 극복한 이순신의 인품’을 한 장이나 할애해 자세히 소개했다. 이순신 또한 류성룡이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역사 기록에도 많이 나오듯이 이순신은 당시 정계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파격적인 특진도 시기의 대상이었지만 잇단 승전보 또한 질투의 대상이었다.

'이순신 자살설'의 뿌리

경상우수사 원균과 겪었던 갈등은 중앙 정계로 연장돼 옥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리기도 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기용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장 교수는 이순신의 죽음과 관련한 여러 기록들을 검토해보면 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정국을 고려해 ‘자살에 가까운 전사를 한 게 아니냐’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순신이 전사한 날은 그를 옹호하던 류성룡이 영의정에서 파직된 다음 날 새벽이었다. 당시 통신수단으로 미루어 파직 사실은 몰랐겠지만, 옹호세력이 정치적으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을 것이다. 또 그 전에도 서인의 모함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던 경험이 있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독려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사실 일본군이 도망가는 상황이고 전쟁이 다 끝나가는 판인데 앞장서 싸울 필요가 있었겠느냐”며 전사 당시 상황에 의문을 제기했다. 최근 국역으로 발간된 <서애전서>에도 정극기라는 사람의 말 중에 이순신을 옥죄어 오는 정치상황과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여해(이순신)가 전라도 고금도에 있을 적에 대감(류성룡)께서 허물을 탄핵당하여 관직에서 파면되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할 말을 잃고는 한숨을 쉬면서 “오늘날의 나라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구나” 하고는 이로부터 매양 배 안에서 물을 떠놓고 하늘에게 자기를 죽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전투가 벌어진 그날 몸소 화살과 탄환이 날아오는 곳에 나가려고 하니, 부장들이 간하여 말렸으나, 여해는 듣지 않고 몸소 나가서 싸웠는데, 조금 후에 날아오는 적의 탄환에 맞아 죽었습니다.’

▲ 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국보 132호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류성룡은 훗날 <징비록>에 이순신의 용맹함과 전사, 그리고 백성들의 애도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순신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몸소 힘껏 싸웠는데, 날아오는 탄환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부축하여 장막 안으로 옮겼는데,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했으며 ...(중략) ... 우리 군대와 명나라 군대는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어져 있는 각 진영이 통곡하여 마치 제 어버이의 죽음을 통곡하는 것과 같았다. 또 영구가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제전을 차리고서 상여를 붙잡고 통곡하기를 “공께서 진실로 우리를 살리셨는데, 지금 공은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길을 막아 상여가 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길 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징비록, 참혹한 전쟁 기록인 동시에 경세서

<징비록>에는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 말고도 전쟁에 참전한 수많은 장수들과 의병들의 이야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대일관계, 전쟁의 조짐, 그리고 임진왜란 후의 대비책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외교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서술돼 있다. <징비록>은 이순신의 <난중일기>, 장현광의 <용사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을 기록한 3대 기록서로 평가된다. 장 교수는 “<난중일기>는 ‘전선일기’이고, <용사일기>는 ‘피난일기’라면 <징비록>은 전쟁 전후 상황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기록한 전쟁 문학인 동시에 경세서”라고 말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정이 가장 어렵던 5년간 영의정을 지냈다. 이순신이 전선에서 싸운 최고의 장수였다면, 류성룡은 전시 국정을 운영한 최고의 리더였다. 류성룡은 비록 파직됐지만, 전쟁의 뼈아픈 기억을 교훈 삼기 위해 집필을 시작했다.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나 경북 안동 하회로 돌아간 류성룡은 전란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곰곰이 반성하고 고찰해, 뒷날의 일에 대비할 수 있도록 <징비록>을 썼다.

▲ 영의정과 도체찰사로서 전쟁을 지휘하면서 류성룡이 썼다는 가죽 갑옷과 투구. 문무를 겸비한 그의 이력을 잘 말해준다. ⓒ 네이버 역사 카페 '부흥'

장 교수는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부자간 혹은 부부간에 서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있다”며 “피가 강을 이뤄 방패가 떠내려갈 정도였다는 표현도 있다”고 말했다. 류성룡은 징비록 곳곳에 전란의 참혹상을 상세히 기록했다.

‘나도 명나라 군사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성안에 남아있던 백성을 보니 백 명 중 한 명도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었고, 그 중에 살아남은 사람도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얼굴빛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 날씨는 매우 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말의 시체가 곳곳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 썩는 냄새가 성안에 가득 차서 길 가는 사람들은 코를 가리고 지나갔다.

<징비록>의 가치를 알고 일본은 이 책이 나오자 몰래 입수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책의 가치가 상당기간 묻혀있었다. 장 교수는 조선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었지만 당시 정계는 이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왜가 강화를 했다면 남북이 그때 분단될 수도 있었어요. 아니면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통치하려고 했을 수도 있죠. 다행히 조선이 유지됐는데, <징비록>을 읽고 제대로 대비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결국 병자호란 등으로 다시 이어졌습니다.”

진보와 보수, 이상과 현실을 아우른 리더십

올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0년 되는 해다. 장 교수는 류성룡의 리더십을 통해 앞으로 외교관계 등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제 다시 갈등이 불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한ㆍ중ㆍ일 3국이 연루된 전쟁은 네 번 있었다. 663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할 때 부여 인근에서 나ㆍ당연합군과 백제ㆍ일본 연합군이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가 3국이 뒤엉킨 첫 전쟁이다. 1274년에는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해 일본 원정에 나서는데 도중에 태풍을 만나 실패했지만 이 또한 3국이 연관돼 있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 땅에서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 왜군이 뒤엉켜 5년이 넘는 전쟁을 벌였다. 마지막으로 1894년 청과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싸운 청일전쟁이다.

장 교수는 일본은 무사도 정신이 700년을 지배해 침략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중국은 중화중심 사상이 깊이 배어있어 오만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선비정신이 700년간 지속됐고, 무신보다 문신을 중시해 문약하다고 말했다.

“지금 해양주권을 두고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일본의 무사도 정신은 약육강식과 힘을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강경하게 나오고 중국에는 숙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장 교수는 지금 시대에 문무겸전의 리더십을 발휘한 서애 류성룡의 리더십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류성룡은 자강 자주 외교를 주창하며,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신무기를 도입하는가 하면 인재를 등용할 때도 신분을 초월해 전문성과 실무능력을 중시했습니다. 유교의 선비정신을 유지하되 경제실용을 앞세운 거지요. 서애 류성룡이 임란 극복의 최고 공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고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겸비한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한 덕분입니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이주헌, 이권우, 한홍구, 장승구, 김진석, 신형철, 정희준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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