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오늘, 유신을 말하다’… 유신 40년 토론회 내일개최

 

▲ 1972년 10월17일 유신 선포 직후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진주한 계엄군 탱크와 ‘10월 유신’을 상세히 보도한 10월18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유신체제가 선포된 지 4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주장은 종종 ‘역사를 외면하는’ 일로 이어졌다.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들은 유신시대의 흔적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유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피할 수만은 없다.

원로 사학자인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계간 ‘역사비평’ 100호 특집 설문조사에서 “당대의 역사는 상당한 시일이 지나서 써야 객관성 있는 서술이 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라며 “어느 한 정권이 정치·경제·사회·문화면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발전시켰는가 또는 억압했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학술단체협의회는 유신 40년을 맞이해 19일 ‘2012년 오늘, 유신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서울 덕성여대 종로캠퍼스에서 연합심포지엄을 연다.

기조발제를 맡은 유초하 충북대 교수는 “5·16 쿠데타로 인해 당시 진행되던 정상적 민주주의로의 이행,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룬 경제개발계획, 남북관계 긴장 완화 등이 모두 무너졌고 맥이 끊겨버렸다”며 “4·19 혁명으로 무너진 이승만 정권보다 더 나쁜 상태로 넘어간 셈인데, 유신은 쿠데타 수준을 넘어 국민주권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총체적 파괴 행위였다”고 말했다.

문제는 “유신이 40년 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고 되레 확장되고 있는 현실”이다. 유 교수는 “오늘날 이명박 정권을 보면 과거 독재정권의 행태들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는 “유신을 들여다보는 것은 말하자면 기억투쟁”이라며 “정상적인 규명을 통해 역사를 정확히 기록해야만 용서나 화해도 가능하고 새로운 정치질서의 창출도 가능한데, 올해 대선에서 또다시 유신정치가 부활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신체제가 끼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살피게 될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부 ‘유신체제와 5·18 항쟁’, 2부 ‘유신체제와 사회체계’, 3부 ‘유신체제와 박정희’ 순서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된다. 다음은 주요 발표 요지다.

■ 유신의 유산과 5·18
군대 동원한 국민 억압 ‘악습’ 반복

5·18 광주항쟁은 유신체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결과 발생했다. 국토를 방위하고 국민의 재산을 보호해야 할 군대를 정치적 목적으로 동원했던 악습이 반복된 것이다.

 

▲ 1975년 1월2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발표하는 박정희 대통령. ⓒ 경향신문

박정희 정권은 정권유지가 위협받는 상황이 올 때마다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 기본권을 통제하고 시위를 진압했다.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반대 시위에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이래로, 유신헌법 선포에서 부마항쟁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유신헌법에서는 민간인까지 군사법정에 세워 처벌할 수 있었다.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이르는 군대식 통치방식은 ‘총력안보’ 아래 모두가 상명하복의 ‘군인’이 되길 강요했다.

박 정권은 주로 한·미연합사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수도경비사령부와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했다. 유신헌법이 통과된 후부터 공수부대의 3대 임무 중 하나는 시위를 진압하는 충정작전이었다. 1980년 5월18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시위 진압도 유신 시절 익혔던 충정훈련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을 탄생시킨 신군부 자체가 유신체제의 가장 큰 유산이자 수혜자다. 유신체제하에서 신군부는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후원을 받아 군 내부에서 가장 힘 있는 파벌로 성장했고,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는다. 신군부는 정권 창출 과정의 국민적 저항에 대비해 ‘K-공작’을 기획, 1980년 2월부터 공수부대원들에게 거의 모든 훈련을 중지한 채 충정훈련에만 매달리게 했다.

군대를 동원하는 명목도 ‘국가안보’로 박정희 정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들에게 정부에 반대하는 국민들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순세력이며 무력으로라도 진압해야 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노영기 성균관대 강사>

■ 박정희 신드롬
빈곤에 대한 공포가 ‘성장주의’ 원인

사람들은 왜 박정희를 그리워하는가? 그간 박정희 신드롬은 수구 언론과 정치인들이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의 정치적 세력 및 개혁을 약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졌다. 두 정부의 집권 기간 악화된 서민경제를 경제 전반의 위기로 규정한 후 대항 모델로 박정희를 제시하면서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 효과를 거둬 박정희식 발전 경제모델 이미지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실패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박정희 신드롬은 단순히 가공된 것이 아니다. 대중의 무의식 속에는 이미 개발주의적 사고가 잠재해 있다. 식민지와 전쟁의 참상을 겪고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로부터 반드시 해방되겠다’며 건설과 성장에 집착해왔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새겨진 의식이자 삶의 태도다. 건물이 올라가는 등의 성장을 체감할 만한 물리적 경험이 없으면 한국인들은 이내 불안에 휩싸인다.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기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거치면서 우리는 ‘가난이 다시 오지 않을까?’라는 공포에 직면했다.

공포에 빠진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몸과 정신에 깊이 각인된 박정희와 개발모델을 가능한 대안으로 떠올렸다. 하지만 현재의 경제위기는 재화량의 부족보다는 부의 편중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재화 생산에만 치중하는 개발과 성장의 경제모델이 아니라 분배를 통한 위기 극복이 요구된다. 분배는 정치적 합의 과정을 요구하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경제인이 아닌 민주적 시민이 되고, 박정희 신드롬이 가진 성장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한길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유신체제 당시 벌어졌던 미니스커트 단속. ⓒ 경향신문

■ 자본축적 메커니즘
정당성 위기, 수출·재벌 특혜로 무마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말에 일어난 경제위기와 선진국·후진국의 국제분업 체계의 변화는 기존의 조립가공형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자본축적 체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성장을 통해서만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정권 유지를 위해서라도 중화학공업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에서 이중의 도전에 직면한다. 국내적으로는 1960년대 후반기부터 실질임금이 상승하는 가운데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이 고양됐고, 1971년 양대 선거에서 김대중과 신민당이 선전했다.

대외적으로 닉슨 독트린과 주한미군 철수는 ‘선 건설 후 통일’이라던 박정희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당성 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안보위기를 조장하면서 유신을 선포하고 8·3 조치를 단행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로 위기를 탈출하려고 했다. 안보위기라는 명목하에 반정부세력을 극단적으로 억압해 전 사회를 ‘총동원체제’로 재편함으로써, 또다시 경제성장을 통한 정당성 회복에 나선 셈이다.

그렇지만 무모한 중화학공업화를 통한 수출주도 경제발전이란 재벌에 온갖 특혜를 줘서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1960년대 말과 동일한 모순점을 드러내면서 1970년대 말의 경제위기를 불러왔다. 이는 10·26 사태와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됐다.

<김창근 연세대 강사>


* 이 글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 황경상 기자가 경향신문에 보도한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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