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와 함께 예술과 인생을 논한 ‘시네마투게더’ 2박3일

부산 해운대 해변 포장마차촌의 밤은 낮보다 뜨거웠다. 시인 남진우는 ‘달의 음악을 들어라’에서 “달빛 아래 서면 그대와 나는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치는 물고기가 된다”고 노래했다. 지난 10일 새벽, 주황색 포장마차촌에 모여든 ‘물고기들’은 해운대 달빛 아래 지느러미를 흔들며 밤새 헤엄쳤다. 취기로 얼굴빛이 붉어진 배우 정우성은 포장마차 17호에서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였고 그의 팬들은 주변을 서성였다. 백사장에선 맨발로 모래의 까끌함을 느끼며 ‘성(性)적 속사정’을 털어놓는 젊은이들에게 ‘누님 배우’ 서갑숙이 맥주 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쳤다.

 

▲ 해운대구 중동 포장마차촌 모습. ⓒ 박다영

말수가 적은 시인 겸 문학평론가 남진우(명지대 문예창작과)교수와 16호 포장마차에 둘러앉은 네 명의 여자는 처음에 조금 쭈뼛거리다 소주 한 잔씩에 무장해제 돼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조총련계 일본인을 다룬 영화 <고(Go)>에서 받았던 문화적 충격, 미국서 보낸 남 교수의 안식년 등이 한창 화제가 됐을 때 불쑥 두 남자가 포장마차에 들어섰다. 대중문화평론가 임진모씨와 그가 운영하는 대중음악웹진 이즘(IZM)의 홍혁의 편집장이었다. 두 사람의 등장과 함께 화제는 음악으로 건너갔고, 흐르는 시간만큼 대화는 무르익었다.

 

▲ 왼쪽부터 부산국제영화제 전찬일 프로그래머, 남진우 멘티 강수현씨, 대중문화평론가 임진모씨. ⓒ 김애지

밤새 쉼 없이 헤엄친 이 ‘물고기들’은 해운대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영화감독, 작가, 교수 등 14명의 멘토(조언자)들이 각각 5~8명의 일반관객과 한 팀이 되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시네마투게더’ 행사에 모인 이들이다. 멘토로는 남 교수와 부지영 감독, 김재기(경성대 철학과) 교수, 배우 서갑숙, 건축가 강기표, 대중문화평론가 임진모 씨 등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나섰다.

첫 만남의 감동 못 잊어 내리 7년 참가한 열성팬도

지난 8일 남진우 교수가 멘토를 맡은 조의 첫 만남 자리. 방송작가, 공무원, 주부, 대학생, 대학원생 등 5명이 남 교수와 인사를 나누었다.  

“여러분이 저와 함께 할 멘티 분들이신가요? 시네마투게더 뿐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 온 거라 많이 어색하네요.”

쑥스러워 하는 멘토와 달리 3회 시네마투게더 행사 이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강수현(31․여․방송작가)씨와 김애지(29․여․주부)씨는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강씨는 유지태 주연의 <거울속으로>를 연출한 김성호 감독과의 첫 시네마투게더를 잊지 못해 이후 매년 이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를 매개로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고. 

남 교수가 직접 고른 이 그룹의 첫 번째 영화는 캐나다 작품인 <항생제>였다. 호러(공포) 영화의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아들인 브랜든 크로넨버그가 연출한 것이어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오후 2시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에서 영화가 시작되자 늘어지는 줄거리에 지친 듯 중간에 극장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이 보였다. 영화가 끝난 후 멘티들이 매긴 평균 평점은 B. 남 교수도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작품이라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말했다.

 

▲ 영화를 본 후 대화를 나누는 남진우 멘토팀. ⓒ 박다영

저녁 7시부터 두 번째로 졸탄 폴 감독의 독일 영화 <여자의 호수>를 본 후 이들 일행은 해운대구 청사포에 있는 한 조개구이집으로 향했다. 이 자리에는 ‘깜짝 손님’으로 남 교수와 중앙대 선후배 사이인 소설가 정찬(동의대 문예창작과), 시인 전동균(동의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함께 했다. 오랜 만에 만난 세 사람이 옛 추억과 근황을 주고받은 뒤 이야기는 영화 감상평으로 이어졌다. “시인의 감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영화 아니냐”는 김애지씨의 질문에 남 교수는 “원래 좋아했던 장르”라고 답했다. 그의 영화적 취향은 한마디로 ‘데이비드’라고. B급 영화, 컬트(소수취향)영화에서 세기의 라이벌로 꼽히는 데이비드 린치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를 가장 좋아한단다.  

“젊을 때 두 데이비드 감독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오늘 크로넨버그 아들 작품은 영 별로였어. 테오도르스 앙겔로플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도 좋아하고. 한국 감독? 내 스타일만 놓고 보면 홍상수 보단 김기덕이지. 하지만 이번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김기덕 영화(피에타)는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어.”

 

▲ 멘티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남진우 교수, 뒤쪽엔 전동균 교수. ⓒ 박다영

컬트영화 얘기에 이어 소말리아의 아덴만에서 작전 중인 군인을 남편으로 둔 김애지씨의 사연, 방송작가를 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강수현씨의 경험담이 좌중의 귀를 붙잡았다. 또  정찬 교수의 고리 원자력발전소 이야기에 대화가 ‘반핵’으로 흘러갔다가, 남 교수가 중국소설가 위화(余華)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책을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소개하면서 문학이 술안주가 되기도 했다.

전문가와 일반 관객이 격의 없이 소통하는 드문 기회

9일 저녁엔 참가자 90여 명 전원이 함께한 ‘시네마투게더의 밤’이 해운대구 중동의 ‘바비스데이’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 <풍산개>의 전재홍 감독, <돼지의 왕> 연상호 감독도 참석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멘토로 참여한 김재기 교수는 이 행사가 ‘부산국제영화제만의 독특한 감성’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장르잖아요. 그러면 영화제도 영화인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 관객들도 쉽게 보고, 즐길 수 있어야 하죠. 그 장을 시네마투게더가 제공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들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고루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죠. 영화제 차원에서 앞으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합니다.”

 

▲ 왼쪽부터 시네마투게더의 밤을 찾은 이용관 집행위원장, 멘티인 강수현씨와 윤지영씨, 멘토 남진우 교수. ⓒ 박다영

 

▲ 중앙에 중절모를 쓴 김재기 교수와 멘티들. ⓒ 박다영

멘티들의 호평도 이어졌다. 신송이(30․여)씨는 “영화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비전공자들도 영화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임진모씨의 멘티 허을수(30·영화감독지망생)씨는 “늦어도 8년 뒤엔 같은 전문가 입장에서 임진모 씨를 만나고 싶고, ‘이 친구 영화는 꼭 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임 씨는 “할 수 있다”고 힘을 주었다. 

열 네 팀 중 단연 눈길을 끈 조합은 배우 서갑숙씨 팀이었다. 26세 대학생에서 49세의 주부까지 여자 셋, 남자 둘이 멘티로 참여한 서씨 팀은 ‘격의 없는 대화’로 가장 끈끈한 결집력을 보여주었다. 오태호(42․영상프리랜서)씨는 “우리는 흘러가는 인생을 함께 나누는 ‘패밀리’로 관계를 정의하고 호칭도 누나, 언니, 형으로 정리했다”며 “하기 힘든 성적인 이야기도 아무런 스스럼없이 했고, 제가 과거에 겪었던 ‘대인 공포증’ 얘기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서씨는 팀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멘티들이 이번 만남에서 뭘 원하는 지 먼저 물었다고 한다. ‘인생 이야기’를 원한다는 말에 언니, 누나처럼 편한 존재가 되기 위해 다가갔다. 그가 선택한 영화와 해운대 해변에서 밤새 이어진 대화를 통해 ‘행복’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 '가족'처럼 허물없이 2박 3일을 보냈던 서갑숙 멘토(맨 오른쪽)와 멘티들. ⓒ 배상현

“노르웨이, 스웨덴, 중국 등 다른 나라의 소시민 이야기나 페미니즘(여성해방운동) 색채가 묻어나는 영화를 선택했어요. (네덜란드 영화)<도미노 효과>는 경제가 무너지면서 모두가 살기 힘들어지고 이로 인해 행복이 사라지는 이야기를 담았는데 행복의 가치 대신 ‘돈’이 중심이 되고 있는 우리 사회 이야기 같았죠. 행복, 사랑의 중요성은 밀려나고 경제, 돈이 우선시 되는 사회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게 영화의 주제였죠. 개인적으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영화를 좋아해요. 제가 궁극적으로 멘티들에게 주고 싶었던 메시지도 그 ‘희망’이었고요.”

‘행복 에너지’를 충전하고 돌아간 사람들

마지막 날인 10일, 남진우 교수는 ‘몰래온 손님’ 한 사람을 더 소개했다. 바로 남 교수의 부인이자 인기 소설가인 신경숙씨. 서로를 ‘경숙씨’, ‘진우씨’라 부르는 다정한 부부와 함께 일행은 영화의전당 소극장에서 아르투로 립스테인 감독의 <순수의 성>을 감상했다.

1950년대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빠져 나갈 수 없는 요새 같은 집에 부인과 아들, 딸을 20여 년간 감금한 채 그것이 가족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고 사는 가장의 이야기였다. 평생 외부인을 만날 수 없었기에 남매간에 성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등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모든 원인을 여자 탓으로 돌리는 거 너무 불쾌하지 않니?”라는 신경숙씨의 질문을 시작으로 “성문이 열려도 가족은 변화하지 않을 것”, “우리도 감시에 익숙한 시대를 보내지 않았느냐”는 등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엉뚱한 질문과 제 멋대로의 영화 해석도 있었지만 ‘정답’이 강요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영화를 재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니까.

마지막 상영작인 <컴플라이언스>(미국․크레이크 조벨 감독)가 끝나니 밤 10시. “인연이 되면 다른 곳에서 또 만날 것”이란 남 교수의 마지막 말과 함께 시네마투게더 남진우 멘토팀은 해산했다. 비슷한 시간, 다른 팀들도 아쉬움 속에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2박3일의 소중한 기억을 안고 떠나는 발길들 속에서 강수현씨가 말했다.

"먹고 자는 동물적 본능 외에 보고 느끼는 사람다운 감각을 일깨워준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시네마투게더=해피투게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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