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질서에 저항해 공통의 목표 실현”

‘월가 점령’ 시위(사진)가 지난 17일로 1주년을 맞았다. 일부 시위대가 1주년을 기념해 맨해튼의 뉴욕증권거래소 점령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떠들썩했던 언론도 조용하다. ‘그 많던 점거자들은 모두 어디 갔나’라는 냉소가 들릴 법도 하다. 많은 좌파 지식인들은 쉽게 절망에 빠지거나 ‘점령 시위는 중산층들이 지위 유지를 위해 나선 것’(슬라보예 지젝)이라는 공격까지도 서슴지 않는 상황이다.

이탈리아의 세계적 좌파 정치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미국 듀크대 교수가 내놓은 <선언>(갈무리)은 그런 냉소와 허무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지난해 내내 벌어진 전 지구적인 민중의 연쇄 봉기를 면밀하게 살펴 온 이들은 ‘점령’ 시위 전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좀 더 넓고 깊게 꿰어 보자고 주문한다. 튀니지에서 벌어진 ‘재스민 혁명’에서부터 시작해 이집트, 리비아를 거쳐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그리고 미국 월가에 이르기까지 장소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을 보인 ‘봉기’들을 하나의 차원으로 보자는 것이다.

▲ 월가 점령’ 시위를 본뜬 ‘D.C. 점령’ 시위 참가자들이 지난해 10월 미국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앞 거리에서 행진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떻게 ‘낡은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과 ‘1%의 탐욕에 대한 저항’이 같은가. 네그리는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기만적이고 잔인한 억압체제는 신자유주의의 전지구화가 시장에 가져온 끔찍한 변형들, 실업·불안정노동·복지파괴 등과 연관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청년실업과 종속·빈곤이 배후에 놓인 아랍의 봉기는 유럽의 저항 운동과 다를 바 없으며, 현 시기의 약탈적인 질서에 맞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개척하려는 움직임이었다는 분석이다.

하트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을 재해석해 이 같은 봉기의 의미를 되짚는다. 보통 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인민의 자치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는 계속 문제가 된다. 레닌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인민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봤다. 이는 당 같은 혁명주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다른 많은 주장에서도 반복된다. 그러나 제퍼슨은 헌법이 주기적으로 봉기를 통해 재구성돼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인민들은 스스로 민주주의와 자치 능력을 학습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하트는 지금, 현재, 여기에서 참여와 봉기를 실천하고 있는 인민들이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2011년에 벌어진 사건들은 바로 ‘20년에 한 번’은 봉기가 반복된다는 제퍼슨의 생각을 입증했다.

책은 현시점에서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과거에 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한 가치를 ‘착취’당했다면 오늘날 금융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채무’를 주고 삶 자체를 저당잡는다. 바로 ‘빚진 사람들’이다. 미디어에 예속되고도 주체적이라 생각하는 ‘미디어 된 사람들’, 불안을 감당하지 못해 국가기구에 몸을 내맡기는 ‘보안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 억압구조에도 사람들의 정치행동을 거세시키는 대의장치는 ‘대의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사람들이 빚을 ‘자발적 상호의존’으로, 미디어를 ‘제각기 생산하는 진리’로, 안전을 ‘두려움 없는 삶’으로 바꾸고, 나아가 독자성을 가진 개인들로 구성된 ‘다중’이 자발적 참여로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멀게 보이지만 멀지 않다. 지도자를 거부하고, 수평적 의사결정과 참여로 진행된 ‘월가 점령’ 시위를 비롯해 무수한 ‘봉기’에서 이미 실현됐다는 것이다.


 * 이 글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졸업생인 황경상기자가 경향신문에 보도한 기사를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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