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기업 ‘열린 옷장’, 정장 기증받아 사회초년생에 대여

취업시즌, 면접을 앞둔 수험생들은 너나없이 ‘뭘 입지’하는 고민에 빠진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 4월 신입구직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91.9%가 ‘면접을 위해 정장 등 옷을 사는 비용이 부담된다’고 답했을 정도다. 이렇게 고민하는 취업준비생들을 위해 선배들이 옷장 문을 열었다. 잘 안 입는 정장을 가진 사회 선배들과 면접용 정장이 필요한 청년구직자들을 연결해 주는 ‘열린 옷장(OPEN CLOSET)’이 지난 7월 개점한 것이다. 

시중 대여료의 4분의 1에 배송과 세탁까지

서울 논현동에 사무실을 두고 인터넷 홈페이지(http://thecloset.mizhost.net)를 통해 영업하는 열린 옷장은 정장 한 벌 당 세탁비와 배송료를 포함해 1만 원을 대여료로 받는다. 별도의 보증금에 약 4~5만 원을 받는 일반 대여업체에 비해 훨씬 싸다. 기증받은 옷이라 상태가 좋지 않거나, 유행이 지난 디자인이 아닐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받은 즉시 깨끗이 세탁하고, 구식 디자인은 새롭게 수선해서 대여하기 때문이다.

▲ 현재 '열린옷장'에서 대여중인 면접 정장들. ⓒ 열린옷장 누리집

열린 옷장의 공동대표 3명은 모두 직장인이다. 대기업 연구원인 박금례(33)씨, 카피라이터 김소령(42)씨, 침구회사에 다니는 한만일(32)씨는 지난해 말 시민단체인 희망제작소가 운영하는 ‘소셜디자이너스쿨’에서 만나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사회초년생들의 ‘면접 정장 고민’에 대해 대안이 필요하지 않나 막연히 생각했는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설문조사를 해보니 반응이 뜨거웠다. 이들은 약 7개월간 퇴근 후나 주말에 만나 차근차근 준비했다. 한만일 씨는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열린 옷장을 도맡아 관리하고, 박금례 씨와 김소령 씨는 회사 생활 틈틈이 일을 돕고 있다.


9월 현재까지 기증받은 옷은 약 150여 벌이다. 이 중에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 선거 유세 때 입었던 양복 두벌도 포함돼 있다. 에스비에스(SBS)의 정석문 아나운서도 열린 옷장의 취지에 크게 공감한다며 정장 한 벌을 기부했다. 프로그래머 박진호 씨는 “면접 때 넥타이가 두 개뿐이라 아쉬웠던 경험이 있다”며 넥타이 11개를 보냈다. 한 30대 주부는 직접 차를 몰고 와 남편이 입었던 정장 3벌과 서류가방 10개를 한꺼번에 기증하기도 했다. 

▲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장선거 유세 당시 입었던 정장 2벌을 이곳에 기증했다. ⓒ 열린옷장
▲ 프로그래머 박진호씨가 보내 온 넥타이. ⓒ 열린옷장

기업들도 호응하고 있다. 한 은행과 남성 정장업체에서는 직원들이 안 입는 옷을 모아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해왔고, 갤러리아백화점 콩코스점은 지난달 24일부터 지난 9일까지 열린 옷장을 위해 ‘안 입는 정장 기증하고 상품권 받아가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한 대표는 “특별히 홍보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 기증이 잇따르고 있어 놀랍다”고 말했다. 

옷 뿐 아니라 ‘이야기’도 공유

 “제가 처음 출근하던 날 입은 옷입니다. 설렘과 기분 좋은 에너지를 가득 담아 보냅니다. 꼭 꿈을 이루시길 바라며, 파이팅!”

열린 옷장은 옷을 기증 받으면서 청년구직자에게 보내는 응원메시지나 옷에 얽힌 사연도 받고 있다. 기증자들이 보내온 손편지엔 청년구직자를 격려하는 따뜻한 마음들이 담겨있다.  교생실습을 함께한 치마, 첫 출근 때 입은 옷 등 사회 초년시절의 추억이 담긴 옷을 기증하며 후배들에게도 행운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케이티에이치(KTH) 모바일사업단장 전성훈 씨는 후배들에게 ‘반성문’을 보냈다.

▲ 옷 기증자들이 보내 온 응원메시지. ⓒ 허정윤

“먼저 살아온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것은 선배들의 잘못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선배들의 20대보다 못한 환경을 후배들에게 남기게 된 것입니다. (중략).......이 옷들은 제가 대학 졸업하면서 면접을 보고 신입사원 생활을 하면서 입던 옷입니다. 유행이 지난 옷이지만 여러분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펼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열린 옷장의 최종 목표는 옷을 매개로 사람을 연결해 주는 것이다. 빌린 옷을 반납하면 끝나는 일회용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응원하고 조언하는 등 지속적 관계가 되길 희망한다. 예를 들어 박원순 시장이 기증한 옷을 서울시 공무원 면접에 입고 간다든가, 정석문 아나운서가 기증한 옷을 아나운서 지망생이 빌려 입고 나중에 조언도 들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한 대표는 “옛 도서관 대출카드에 빌려간 사람 이름이 차곡차곡 적혀있듯이 각각의 옷에도 대여자의 이름과 후기가 기록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앞으로 열린 옷장은 홈페이지에 같은 옷을 빌려 입은 사람끼리 소통할 수 있는 게시판도 만들 예정이다.

고객 중에 고등학생, 할아버지도

취업 ‘비수기’인 7월에 문을 열었고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옷을 빌려간 사람은 40여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화나 SNS 등으로 문의를 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200명 정도가 관심을 보였고, 취업시즌이 다가오면서 점점 이용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한번은 어떤 분이 급히 사무실까지 찾아와 빌려 간 일이 있어요. 아직 오프라인 매장이 없어서 택배로 발송하는데, 정말 급했는지 직접 찾아 오셨더라고요. 딱 맞는 옷을 찾아 만족하며 가셨는데, 참 뿌듯했습니다.”

사회초년생의 대여가 많지만 가끔은 특별한 행사를 앞둔 고등학생이나 노신사도 찾아온다. 열린 옷장 관계자들은 이곳 옷을 빌려 입고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기쁘다고 말한다. 

열린 옷장은 가을 겨울 취업시즌을 맞아 좀 더 분주해졌다. 최근 기증받은 옷을 사진으로 찍어 홈페이지에 전시하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부족한 일손은 사진작가와 패션대학원 교수 등의 ‘재능기부’로 보충하고 있다. 스스로 찾아온 인턴 전버들(20․한양대 사회과학부)씨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 '열린옷장' 공동대표 한만일 씨와 인턴 전버들 씨. ⓒ 허정윤

한 대표는 “아직 시작단계라 부족한 점이 많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면접용 정장뿐 만 아니라 등산복이나 한복 같은 생활 의류도 서비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아름다운 가게’와 제휴한 대한통운이 기증 물품을 무료 배송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공헌활동을 원하는 세탁업체나 배송회사와 제휴를 맺는 작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더 큰 규모로, 보다 다양한 지역에서 서비스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열린 옷장에 옷을 기증하고 싶은 경우 홈페이지에 주소와 연락처를 남기면 수거박스를 보내준다. 정장뿐 아니라 스카프, 구두, 가방 등 면접에 필요한 모든 의류와 액세서리를 기증할 수 있다. 대여를 원하는 경우에는 홈페이지에 전시된 사진을 보고 옷을 고른 후 이용료를 입금하면 집까지 보내준다. 이용 기간은 옷을 받은 날로부터 일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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