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양호근

▲ 양호근 기자.
‘핸디캡 경주’라는 게 있다. 경마에 출전하는 말의 능력에 따라 부담 중량을 달리하는 경주다. 경주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말이 더 무거운 패드를 안장 밑에 깔고 달린다. 말들의 실력을 비슷하게 만들어 경마의 박진감을 높이고 레이스의 불확실성을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경주마의 부담 중량을 조절하는 사람이 ‘핸디캐퍼(Handicapper)’다. 이들은 부담 중량을 결정하기 위해 말들의 경주 기록뿐 아니라 보행 상태, 진료 경력, 상대 전적, 그리고 최근 컨디션까지 꼼꼼히 살핀다. 한편으로 역차별 논란이 일 듯하지만 경마를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인정되고 있다. 강한 말에게 부담을 주고, 약한 말에게 혜택을 주면서 경기에 출전하는 모든 말에게 ‘동등한 우승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동등한 우승 기회는 우리 사회로 따지면 ‘동등한 성공 기회’다. 하지만 어떤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고, 오히려 ‘개천에서 종 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인과 관료들도 우리 사회의 핸디캐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여전히 기세등등한 한국 사회에 핸디캐퍼는 없다. 대기업은 손쉽게 시장을 장악하고, 지네발 식으로 계열사를 늘려간다. 한국 사회가 질주하는 사이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88만원 세대’와 ‘10억 연봉자’라는 극심한 양극화로 이어졌다.

대기업이나 부유층은 ‘강한 말’이다.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맨몸으로 싸워 이길 수가 없다. 핸디캐퍼의 역할은 ‘불평등의 평등’을 실천하는 것이다. 대기업에는 더 막중한 책임과 제재를 가하고, 중소기업에는 혜택을 줌으로써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자증세와 복지확충, 그리고 경제민주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마다 경제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핸디캡 경주를 조장하겠다는 얘기다. 19대 국회 개원 전부터 새누리당은 ‘100% 국민행복 실천본부’를 구성해 ‘경제민주화 신뢰정치’ 분과를 만들었고, 민주통합당은 ‘민생공약실천특위’를 출범해 ‘경제민주화’ 본부를 설치했다.

문제는 실행능력과 의지이다. 핸디캐퍼들은 부담 중량을 정할 때 마주나 조교사들로부터 불평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최소 5년간 교육과 실무를 거쳐 양성된다. 핸디캐퍼 역할을 하겠다는 정치인들이 재벌과 가진 자들의 볼멘소리를 무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새누리당은 벌써부터 대기업의 장점은 살리고 사회적 책임을 늘리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있고, 민주당은 재벌개혁에 앞장서겠다고 말하지만 추진동력이 얼마나 강할지 썩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부자 증세도 흉내를 내는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부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벼랑에 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공정하고도 소신있는 핸디캐퍼들이 필요하다. ‘적자생존’만이 아닌 ‘공생공존’이 강조돼야 하는데, 그런 정책을 밀고 나갈 주체가 불분명해 보이니 신뢰가 떨어지는 것이다. 모처럼 국민적 합의로 이끌어냈던 대형마트와 기업형수퍼마켓의 주말 영업규제마저 재벌들의 끈질긴 저항과 보수적인 법원 판결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최재천 교수는 저서 <호모 심비우스>에서 공생하는 인간이 우리의 생존법이라고 했는데, 우리 사회는 끝내 생존의 법칙을 외면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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