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진희정

▲ 진희정 기자.
‘이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국민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서 잠시만 결심하면 갚을 수 있는 일이라.’

경제를 파탄에 빠트려 대한제국을 예속하려던 일제는 불필요한 차관을 높은 이자까지 물어가며 쓰도록 강요했고, 1907년 제국의 국채는 천삼백만원으로 불어났다. 이에 이천만 동포가 석 달간 금연하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자는 내용의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다. 고종이 담배를 끊고 참여하면서 범국민운동으로 번졌고, 대구에서는 부인들이 패물까지 내놓았다. 국채를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길 판이니 조국의 존망이 걸린 천삼백만원을 기 쓰고 모았겠지만, 원래부터 남에게 폐 끼치고 못 사는 국민성도 한몫 했으리라.

남의 돈 끌어다 쓰고 맘 편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빚지기 싫어하는 국민적 체질은 97년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한 번 더 확인됐다. 당시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했다고 발표하자, 국민들은 너나없이 금을 모았다.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감에 결혼 예물, 돌 반지, 금메달까지 아낌없이 내놓은 것이다. 국민의 헌신은 IMF가 요구하는 수준의 시장개방과 노동법 개정, 긴축재정을 감내하는 희생으로 이어졌고, 2001년 8월 한국은 빠르게 IMF관리체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환율은 몇 배로 치솟고 주식값은 몇 배로 떨어진 상황에서 ‘코리안 세일’이 벌어져 우리 알짜기업과 부동산들은 대거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다.

2008년 미국 발 세계금융위기를 비롯해, 그리스를 신호탄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럽 재정위기는 IMF가 제시한 무장해제 수준의 각종 조처에 제 허리 끊어지는 줄 모르고 허리띠 졸라맸던 우리의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블룸버그통신> 경제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 역시 유럽이 한국의 위기극복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기를 국민적 연대로 극복했다는 우리네 자부심과 달리, 그가 얻어야 한다는 교훈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금융위기는 사실 경제 특권층에 의해 벌어진 일인데 대규모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인들이 한국인들처럼 전국민운동에 나서야 하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장롱 속 귀금속을 들고 나오는 대신, 긴축재정에 반대하는 거리 시위가 등장했다. 유럽연합 주요국들이 줄줄이 부도 위기에 내몰렸지만 금 모으기나 시장개방에 전국민이 나섰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부자 증세 대신 대다수 국민의 사회적 임금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허리띠 졸라매기’를 거부하려 했다.

‘긴축’ 중심의 신재정협약을 다시 논의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지난 5월 프랑스 국민들은 ‘메르코지’라 불리며 독일 메르켈 총리와 긴축정책을 주도했던 사르코지 대신 ‘확장’과 ‘팽창’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프랑수아 올랑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스 총선과 독일 지방선거에서도 집권당들이 패배하는 등 긴축에 대한 ‘저항’이 기존 정치 지도자들을 심판하며 재정위기 이후 유럽의 정치지형을 바꾸고 있다.

‘긴축은 더 이상 우리의 운명일 필요가 없다’는 그들에게 우리는 왜 금 모으기 운동을 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을까? 우리가 특유의 국민적 연대와 희생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한 결과가 ‘아시아의 현금 인출기’ ‘안전한 임시 대피소'로 불리는 거라면 억울한 일이다. 국제경제 흐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누구보다 빠르고 크게 휘청거리는 안정성 없는 한국경제를 유산으로 남긴 ‘IMF 모범졸업생’ 타이틀이 뭐 그리 자랑일까? 그 결과 우리의 위기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페섹의 말처럼 위기가 발 밑까지 쳐들어 왔다고 해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는 식의 해결이 능사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물론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던 우리 국민의 순수한 열망이 빚어낸 금 모으기 운동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우리는 왜 유럽처럼 다른 방법들을 고민해보지 못했냐는 것이다.

긴축재정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빚 갚는 데 급급한 나머지 우리 경제가 감당 못할 정도로 개방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던 국가경제 체질 개선이었을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안정성 없는 우리 경제는 이미 제3, 제4의 국채보상운동을 예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997년 당시 IMF의 긴축정책을 거부한 말레이시아에서, 그리고 지금 유럽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어수룩한 ‘호구’(虎口)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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