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특강] 박흥영 <인간시대> PD의 ‘휴먼 다큐 만들기’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대 사하라>, <인간시대>, <한강의 사계> 등 시대를 풍미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박흥영 세명대 교수(전 MBC PD)가 대뜸 던진 말이다. 미술학도였던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PD가 되었다고 한다. 얼떨결에 시작한 PD일은 스스로 표현하길 자신의 “자기중심적” 성격에 매우 잘 맞았다.

그가 PD가 돼서 처음 맡은 프로그램은 음악방송이었다. 그러다 <인간시대>라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유명세를 타게 됐다. 박 교수는 ‘휴먼 다큐 만들기’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다큐멘터리 PD로서 자신을 있게 한 <인간시대>를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 제천 세명대학교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박흥영 교수. ⓒ 안형준

“자막을 손으로 써넣어 제작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시에는 방송환경이 열악해 우리가 장비를 만들어가며 촬영하기도 했어요. 1990년 부장대우가 되면서 <인간시대>라는 다큐 프로를 맡아 팀장 겸 연출을 시작했는데 ‘이삭줍기’는 그 첫 작품입니다. 잊을 수 없는 프로죠.”

이 프로그램은 프라임 시간대를 꿰차며 안방극장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유명 연예인을 간판스타로 내세우는 요즘 예능프로만큼 당시 <인간시대> 시청률이 높았다고 한다. 삼성에서 주는 상까지 받았다. 시쳇말로 ‘잘나갔다’. PD를 천직으로 생각하고 일하다 보니 현재까지 왔다고 말하는 그는 <인간시대> 제작과정을 소개하며 휴먼 다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다큐에 PD가 출연하는 건 시청자 몰입 방해”

“<인간시대>에서 보통사람을 다뤘습니다. 보통사람이지만 특별한 사람이죠. 그런 사람들을 통해 시청자들의 감정 몰입을 끌어냈습니다. 카메라 존재가 안 느껴지도록 찍는 거죠. 근데 요즘 휴먼 다큐들은 옛날과 달라요. 화면의 수평도 안 맞고 PD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출연자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는 등 등장인물이 시청자와 격리되기 쉬운 요소가 많아졌어요.”

박 교수는 ‘이삭줍기’ 편 비디오를 보여준 뒤 과거와 현재의 제작자들이 다큐에 접근하는 방법이 어떻게 다른지 부연해서 설명해주었다. 가장 대비되는 부분은 다큐 내의 카메라 인식 유무다. 그는 다큐의 첫 번째 요소를 ‘몰입’으로 규정하고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를 가능한 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카메라의 움직임이 비교적 적다. 자막도 찾아볼 수 없다. 근래의 <인간극장>과는 차이가 있다.

제작자가 화면에 노출되는 것 또한 피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더불어 PD가 질문을 하는 행위도 감정몰입을 막는 요소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BBC 자연 다큐 등을 보면 제작자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최근 많은 다큐에서 카메라의 움직임과 함께 PD의 설명이 추가된다. 소재 선정에 따른 편법이다.

이런 일련의 요소가 반드시 피해야 할 요소는 아니다. 제작자의 설명은 시청자의 이해를 돕고, 카메라 움직임은 생동감을 더한다. 그럼에도 그가 과거 다큐 촬영기법을 추구하는 이유는 휴먼 다큐의 특성에 있다. 휴먼 다큐는 기본적으로 휴머니즘, 곧 인간의 감정 등에 호소해 시청자를 화면에 빠져들게 하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 <인간시대>의 '이삭줍기'를 시청한 뒤 박흥영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 ⓒ 안형준

작가와 PD 끊을 수 없는 ‘애증’ 관계

“프로그램은 작가와 함께 만듭니다. PD가 촬영하고 현장에서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작가가 개입하는 거죠. 편집해 놓은 영상을 보고 토론하고 싸움도 하면서 합의해 만들어 나갑니다.”

PD들은 현장에서 직접 보고 오기 때문에 모든 장면에 애착이 간다. 작가는 아니다. PD들이 촬영한 그림만 받는다. 그래서 PD는 매번 촬영 현장에서 느낌을 메모한다. 당시 현장에 참석하지 않았던 작가를 위한 배려다. 이로써 작가는 PD와 다르게 촬영분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진다.

“사마귀를 찍었어요. 특히 수컷의 짝짓기 본능이 대단한데, 암컷에게 잡아먹히면서 암컷 한 마리에 수컷 다섯 마리가 달라붙은 장면도 있었습니다. 결국 쓰지 못했는데, 본질은 애착이 가도 결국 필요한 부분을 구분하며 잘라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처럼 작가는 PD가 내리기 어려운 결정을 돕는다. 내레이션도 작가의 몫이다. 당시 휴먼 다큐 작가 중 최고로 손꼽히는 박명성 작가가 <인간시대>를 맡았다. 인간시대 내레이션은 온전히 이 작가의 작품이다. ‘이삭줍기‘란 제목도 작가가 떠올렸다. 출연한 노인 넷 중 셋이 80세 언저리다. 죽음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가을이 지난 뒤 ‘정리’의 느낌이 나도록 제목을 붙였다. 논에서 다 떨어진 벼 이삭을 줍는 것을 ‘이삭줍기’라고 하는데 출연진과 딱 맞아 떨어졌다. 작가의 제안을 박 PD는 곧바로 수긍할 수 있었다.

▲ 박흥영 교수는 휴먼 다큐 촬영과정에서 유의할 점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 ⓒ 안형준

PD와 작가 사이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박 PD는 열린 결말을 두고 작가와 다툰 적이 있다. 박 작가가 TV에 비친 노인들의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다루며 갇힌 모습으로 끝을 내자고 주장했다. 메시지를 전하자는 거였다. 그러나 다큐의 본령은 영상을 통해 화면 속 인물과 사건을 시청자가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박 PD와 견해가 달랐다. 결국 결론 없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하이라이트는 그거예요. 출연자들을 대조시키는 거죠. 자식에게 대접받는 부부와 남겨진 이들. 정답이란 없는 건데 그런 것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시청자가 느끼면 된다고 생각해요.”

출연자가 감추려는 것 자연스레 드러내려면

“카메라맨과 PD의 관계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서로 사이가 좋아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데 경우에 따라 선후배가 바뀌기도 하는 등 둘 관계가 애매해요. 개인적 역량으로는 PD가 시킨 것을 잘 따라 주면서 감각도 있는 카메라맨이 좋습니다.”

촬영을 하다보면 놓치는 장면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특히 호흡이 맞지 않는 카메라맨을 만날 때면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박 교수는 가끔 자신의 눈이 카메라이길 바랐다는 우스갯소리를 꺼내며 당시를 떠올렸다. 영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앵글과 빛 등을 탁월하게 찍어내는 카메라맨을 기대했지만 <인간시대>를 함께 만든 한 카메라맨은 우직하기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PD와 카메라맨은 현장에서 늘 함께하는 만큼 고생도 공유한다.

PD는 휴먼 다큐 출연자에게 카메라를 쳐다보지 말 것을 권한다. 그리고 출연자의 24시간을 카메라맨과 함께 지켜본다. 여기서 어려움이 발생한다. 출연자는 자신의 생활을 감추려 하고 촬영자는 보여주려 하는 것 이상을 담아내야 한다. 이 거리를 좁혀 출연자의 생활을 자연스레 이끌어내는 것을 방송용어로 ‘무장해제’ 과정이라고 한다. 약 2~3일이 걸린다.

촬영은 대체로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숙소에서 카메라맨을 비롯한 조연출 등과 그날 촬영분을 분석한다. 기간이 길어지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어진다. 박 PD는 53분짜리 한 프로를 위해 1천분 가까운 시간을 촬영한 적도 있다. 방송분량을 위해 900분 넘게 잘라냈다. 효율성 면에서 상당히 낮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로 프로그램에 정성을 기울인다. 특히 자연 다큐 <한강의 사계>를 준비할 때 촬영 분량이 엄청났다.

1인 제작 시스템 득세할 것

“앞으로는 1인 카메라맨 시스템이 대세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카메라는 소형화하고, 편집시스템이 간소화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죠.”

좋은 다큐의 기준을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휴먼 다큐는 자연생태환경과 다르게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점을 중시한다. 거기서 비롯되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협업과정의 부작용을 줄일 필요가 있다. 1인 제작 시스템이 정착되면 제작자의 시선을 온전히 프로그램에 투영할 수 있다. 당연히 몰입의 강도가 높아진다.

그러나 제작자의 역할은 한층 커진다. 섭외부터 시작해 내레이션은 물론 촬영과 편집까지 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위한 일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박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시청자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것은 훌륭한 다큐멘터리관(안목)을 가진 PD가 내레이션, 촬영, 편집 등을 도맡아 하나의 프로를 제작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릅니다. 그런 면에서 휴먼 다큐에서 시대의 결핍을 담은 어떤 인간형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결국은 보편적 사회 속에서 소신 있게 만든 작품이 개인의 공감을 산다면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인간을 통찰하는 안목을 키워야 합니다.”

모두의 공감을 사는 작품은 없을 뿐더러 그런 영상은 좋은 다큐가 아니다. 그 때문에 PD는 열린 자세로 선택을 마주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박 교수는 강의 말미에 PD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열린 결말을 고수했던 당시 그 프로처럼 학생들에게도 여운을 남겼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겠죠.”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며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저널리즘특강>은 보도와 칼럼, 방송제작, 매체창업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합니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언론사의 핵심간부와 논객들이 한 특강을 <단비뉴스>가 중계합니다. 이 특강은 우리 저널리즘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도 흥미롭지만, 학생이 쓴 기사를, 함께 강의를 듣는 강좌책임교수가 데스크를 봄으로써 ‘강연•연설기사 쓰기’ 수련을 겸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특히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학생들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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