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슬기

▲ 이슬기 기자

냉면육수는 이름처럼 육수(肉水), 곧 고깃물일까? <채널A>의 ‘먹거리 X파일’ 제작팀은 늘 통념에 도전한다. 제작팀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전국의 유명한 냉면집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육수 맛만큼은 전국 최고”라고 자랑하는 한 사장은 으슥한 곳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쪽지 가격이 무려 4천만원. 정말인지 몰라도 육수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거금을 들여 산 ‘비법’이란다.

공짜로는 보여줄 수 없다던 사장은 취재진이 50만원을 준 뒤에야 ‘비법’이 적힌 종이를 펴 보였다. ‘며느리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비밀은 충격적이었다. ‘조미료 500mg, 동치미 20ml, 그리고 양파 조금과 물’. ‘조미료는 CJ것이 가장 맛있다’는 문구도 있었다. 취재진은 50여 곳 냉면집을 잠입 취재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고기로 육수를 내는 곳은 많지 않았다.

‘몰래카메라’를 장착한 핸드백을 갖고 들어갔던 가게에 6mm카메라를 들고 다시 들어가 정식으로 취재 요청을 했다. 비로소 "고기 대신 조미료로 맛을 냈다"고 털어놓는 사장부터, "육수를 고기로 우려내 만든 것이라고 손님에게 말한 적 없다"고 말하는 주방장, "다들 그렇게 하는데 왜 우리한테만 이러느냐"며 버럭 화를 내는 사람까지 가지각색이었다. 조미료가 몸에 해롭긴 하지만 먹지 못할 음식은 아니니, 육수를 조미료로만 맛을 낸 주인들을 처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육수’라고 버젓이 걸어놓고 ‘조미료탕’을 판 것이 과연 정당할까?

겉 다르고 속 다른 곳이 어디 냉면집뿐이랴. 총선을 앞두고 당 쇄신을 외치며 각 당들은 새 당명을 내걸었다. 연대를 외친 진보진영은 당명마다 ‘통합’을 넣었고, 쇄신을 외친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돈봉투 파문과 이상득 전 의원 사태를 통해 여전한 구태를 보여준 새누리당에 ‘새로움’은 없다. 야권연대는커녕 선거 내내 분열된 모습을 보여준 민주통합당에도, 최초로 한 당 안에 두 개의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 만큼 분열된 진보통합당에도 ‘통합’은 없었다.

이름만 바꾸면 다 되는 줄 아는 우리 정치권은 ‘조미료탕’을 육수라며 속여 파는 냉면집과 다를 게 뭔가? 양심이 있다면 육수를 진짜 고기로 우려내든가, 육수라는 이름을 ‘조미료탕’으로 바꿔 달든가 해야 할 일이다. 대선을 앞두고 두 진보당은 당명에서 ‘통합’을 빼기로 했다. 그러나 이름만 바꿔 단다고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이 봉합될 거라고 기대하는 국민이 있을까? 그동안 우리 정치권은 선거를 앞두고 당명을 바꾸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왔다. 냉면 육수가 ‘조미료탕’이란 걸 알게 된 소비자들이 그 집을 다시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걸핏하면 간판만 바꿔 달고 구태를 반복하는 정치권에도 이런 불이익을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