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Fan] 한여름 밤의 '판타스틱 영화제' 개막

태풍이 비와 습기를 몰고 가버려 모처럼 상쾌했던 19일 저녁은 영화 한 편 보기 딱 좋은 날씨였다. 개최 시기가 장마철이어서 툭하면 빗속에 개막식을 치렀던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PiFan)가 이번에는 때마침 지나가버린 태풍 덕을 봤다. ‘사랑, 환상, 모험’을 주제로 다양한 장르영화를 선보이는 부천영화제는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와 더불어 국내 3대 영화제로 꼽힌다.

주력 장르는 공포영화… 231편 29일까지 선보여

16돌을 맞은 부천영화제는 상상력 풍부하고 미래지향적인 소재를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영화들로 영화 소재의 폭을 넓혀왔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제들과 구별된다. 특히 이번 영화제는 주력 장르를 ‘호러’(Horror)로 선정해 최근 침체된 공포영화의 부흥을 견인하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총 47개국 231편에 이르는 스크린 작품들뿐 아니라 다양한 거리공연과 전시, 이벤트들로 더욱 풍성해진 축제가 29일까지 벌어진다.

영화제의 서막인 레드카펫 행사가 시작되는 오후 여섯 시, 부천실내체육관 주변은 영화제에 참석하는 스타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부천영화제의 공식 홍보대사인 ‘PiFan 레이디’로 선정된 박하선을 시작으로 남보라 오인혜 유연석 장나라 하정우 하지원 민효린 이제훈 서인국 김지영 등 수많은 스타들이 레드카펫을 밟으며 팬들에게 인사했다. ‘바쁜 스케줄에도 부천에는 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식의 배우들 인사말과 포토라인을 가득 메운 수많은 취재진들이 해마다 커지는 부천영화제의 위상을 실감하게 했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은 배우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하정우, 하지원, 박해일, 이제훈. ⓒ 김혜인

오후 일곱 시, 경기도립무용단 ‘달하’의 공연으로 개막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가수 장우혁과 배우 장서희가 진행을 맡았고, 부천영화제 김만수 조직위원장과 김영빈 집행위원장의 개막 선언과 환영 인사가 이어졌다. 영화 제작진들이 선정하는 ‘프로듀서스 초이스’에는 배우 하정우와 하지원이, 부천 시민들이 선정하는 ‘판타지아 어워드’에는 이제훈, 민효린이 수상했다. 이어 개막작 ‘무서운 이야기’의 감독과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영화 소개와 제작 소감을 밝혔다.

▲ 개막식 사회를 보는 가수 장우혁과 배우 장서희. ⓒ 김혜인

‘호러’의 새로운 가능성 ’무서운 이야기’

인간이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이라면, 공포에 의한 자극도 쾌락의 일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어날 법한 현실 속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상상이 덧대어지면 인간이 느끼는 공포감은 극대화한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 자극 때문에 식은땀이 나고 높아진 체온은 외부 온도를 차게 느끼게 한다. 이렇게 온 몸으로 감상하는 특징 때문에 공포영화는 여름마다 관객들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최근 공포영화 인기가 점점 하락하고 있었다. ‘공포영화’하면 뻔히 생각나는 소재와 천편일률적인 연출 기법, 졸속 제작으로 관객들이 더 이상 새로운 자극을 얻지 못한 탓이다.

‘무서운 이야기’(감독 민규동 정범식 임대웅 홍지영 김곡 김선)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공포영화가 어떻게 진화해야 하는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는 영화다. ‘무서운 이야기’는 공포영화로는 이색적으로 4편의 속편을 가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됐다. 언어장애를 가진 연쇄살인마(유연석 분)는 긴장감 없이 잠들지 못한다. 이런 살인마에게 납치된 여고생(김지원 분)이 시간을 벌기 위해 네 개의 무서운 이야기를 해준다는 설정이다.

영화는 풍성한 소재만큼 한 시간 오십 분 동안 관객들을 쉴 새 없이 몰아붙인다. 속이 꽉 찬 네 가지 호러 에피소드들을 잇는 브릿지 내용마저 연쇄살인범과 피해자라는 설정이니,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안도의 한숨마저 쉴 틈이 없다. 네 편의 이야기들은 저마다 다른 방법과 특징으로 관객들의 공포심을 자극한다.

▲ 영화 '무서운 이야기' 공식 포스터

아름다운 전래동화들이 공포영화로 둔갑

첫 번째 이야기 ‘해와 달’은 전래동화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소재를 차용했다. 엄마 없이 두 남매만 남은 집에서 택배 배달원이 이들을 위협한다는 내용으로 꾸려진다. 영화 ‘기담’으로 200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상을 수상한 정범식 감독이 연출했다. 감독은 아이들 둘만 있기에는 너무 넓어 마치 텅 빈 것 같은 집 안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불안하고 초조한 심리를 한껏 이용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평이한 상황은 관객들이 아이들 감정에 깊이 공감하도록 한다. 여기에 강약이 확실한 배경음악과 느리고 빠른 카메라 워크는 관객들을 더욱더 공포로 몰아넣는다. 상상이 현실로 이어지는 이음새는 비록 어색하지만, 철거민 이야기를 그려 현실을 영화에 반영하려고 한 점과 ‘악행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래동화 특유의 인과응보 교훈을 녹여낸 것은 신선하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

▲ '해와 달'은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 '무서운 이야기' 캡처.

이와 반대로 전래동화 ‘콩쥐팥쥐’를 차용한 세 번째 이야기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해와 달’과 달리 철저하게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만을 다룬다.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인육을 먹는 60대 민 회장, 이런 회장님과 결혼해 경제적인 안정을 얻으려고 서로 다투는 콩쥐와 팥쥐, 그리고 자기가 낳은 딸만 위하는 이기적인 엄마 등 출연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자신의 욕망을 한껏 드러낸다. 그릇된 욕심은 결국 비극적인 팥쥐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가족은 함께 파멸의 길을 걷는다. 잔혹한 욕망으로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원하는 바를 얻는 유일한 캐릭터가 어마어마한 경제력, 즉 권력을 가진 민 회장이라는 점은 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두 번째 이야기 ‘공포비행기’는 공간적 공포감을 극대화했다. 연쇄살인범을 비행기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심리적 불안감과 이런 불안이 현실화하는 과정만을 집중적으로 그려냈다. 허공 위에 떠있어 비행기 내부에 있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이 현실을 도울 수 없다는 점이 상황을 구제할 수 있는 대부분 변수를 없앤다. 제한된 변수와 공간은 인간을 더욱더 공포 속으로 몰고, 관객이 그 상황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마지막 이야기인 ‘앰뷸런스’에서는 한국 관객에게는 낯선 좀비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에서도 앰뷸런스라는 제한적 공간이 공포를 부르지만, 그보다 좀비 감염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불안감을 주는 요인이다. 특히 인간의 보편적이고도 고귀한 감정인 모성애가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점은 공포영화에서 느끼기 힘든 안타까운 감정을 자아낸다. 좀비의 충격적인 모습이 시각적 공포를 자극한다는 점도 신선하다.

‘무서운 이야기’는 이처럼 다양한 소재를 액자식 구성으로 폭넓게 아우르면서 공포영화가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 선보임과 동시에 공포심을 자아내는 다양한 심리적 요소를 제시한다. 탄탄한 구성과 기획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한국 공포영화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장르영화의 잠재력과 폭발력을 선보인다는 점에서도 부천영화제 개막작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영화를 관람한 대학생 이상은(21•여•서울) 씨는 “다양한 장르영화를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천을 방문했는데, ‘무서운 이야기’가 단순한 공포영화에 그치지 않고 사회 현상과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고찰을 보여줘서 좋았다”고 말했다.

*사족: 우리는 학교 동급생인 여자 둘이서 영화를 보았는데, 공포가 엄습할 때마다 몸을 움츠리는 게 고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남녀 커플이 많았는데, 어깨를 감싸 안은 모습들이 부러웠다. 아, 공포영화는 저렇게 짝 지워 오는 거였구나! 올 여름, 공포영화가, 더 가까워지고 싶은 커플들의 관심까지 긁어 모아, 새로운 활력을 얻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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