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시장' <동대문 봄장>의 하루

대한민국 수도 서울. 그곳은 매번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일곱 빛깔 무지개색보다 많은 지하철 노선도는 수도 없이 나를 희롱했고(중앙선은 한 시간 만에 오질 않나, ‘급행’이라나? 어쩔 땐 내가 내리고 싶은 곳엔 서지도 않더라), 고층 건물의 유리창이 튕겨내는 햇빛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햇빛이 너무 따가워 알제리인을 죽였노라’ 말했던 부분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도록 해줬다. 한 마디로 서울은 내게 불친절하고 피곤한 도시였다.

유월 초입. 생전 처음 만져보는 소니 DSR-PD170을 끼고, 계륵같이 여겨지던 삼각대를 이고, 개인 가방까지 둘러매고 서울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꼴이 퍽 우스웠다. <동대문 봄장>으로 가는 길로 가는 마음은 내 몸만큼이나 무거웠다. 처음엔 홍대 프리마켓과 자매 즈음 되는 곳이겠거니 여겼고, 더 솔직해지자면 순전히 다큐멘터리 제작실습 과제만을 위해 찾은 곳이었기에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봄장>이 열린다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내리자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와 마주했다. 슬슬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DDP 담장을 따라 걸어가다 <동대문 봄장> 간판을 발견했다. 도착한 장터에는 이미 10명 남짓한 장터 기획팀이 개장을 준비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카메라만 들고 있기 서먹해 단순 작업으로 일손을 거들었다. 개장시간이 다가오자 속속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물건을 진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빨리 찍고 가자’는 생각뿐이었다.

<봄장>은 서울이란 대도시에 ‘억지 인간미’ 부여를 위한 단발성 이벤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런 것이 열리는 장소가 시민의 혈세로 올라가는 DDP 옆 광장이라니! 이 얼마나 상징적인가. 하지만 이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일까. 돈 말고 거래하는 ‘노머니 시장’에는 진열된 물건들이 금세 다른 물건으로 바뀌어 있었고, ‘10초 초상화’ 코너에는 저마다 쌀 한 봉씩을 지참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촛불소녀’를 그려 ‘촛불이 아빠’로 불리는 디자이너 박활민씨(하자센터)는 이날 화분 받침대로 안성맞춤인 미니 나무 의자를 선보였고, 의자는 쌀 4kg으로 교환되었다. 장터에서 모인 쌀은 창신1동 사회복지센터를 통해 쪽방촌으로 전달된다. 장터에서 쌀로 거래하고, 이렇게 모인 쌀을 기부하는 이들을 <봄장>에서는 쌀과 아티스트의 합성어인 ‘쌀티스트’라고 부른다.

봄장은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우리네 옛 장터에도 끊임없이 노래가 흘러나왔던 것처럼 <봄장>에도 끊임없이 노래가 흐른다. ‘버스킹 장’에는 장터를 오가는 모든 이가 직접 참여해서 악기를 연주하는 공연부터 왕성히 활동하는 인디 밴드의 실황 공연까지 들을 수 있다. 장터 한쪽에서는 <봄장>의 취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야외강의도 열린다. 이쯤 되면 여기가 장터인지, 공연장인지, 강의실인지 그 정체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시장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단순한 시장으로 그치지 않는 <봄장>만의 매력은 매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랐다.

<봄장>의 기획 의도는 화폐를 경시하는 풍조 조장이 아니다. 화폐의 가치에 가려져 잊고 살았던 것들을 다시 회생시키고자 하는 문화 형성이다. 거대자본에 골목시장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모습에 디자인으로 반기를 든 사람들의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련되지 못하고, 특색 없는 장터에서 벗어나 톡톡 튀는 디자인과 각양각색의 아이디어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장터를 꿈꾼다. 한 마디로 대안장터다.

<봄장>의 꿈은 바로 옆 DDP로도 이어진다. 오세훈 전 시장 때 구상된 ‘세계 디자인 메카’라는 DDP의 비전이 박원순 시장이 재임하면서 ‘함께 만들고 누리는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특히 DDP 안에 들어설 ‘디자이너스룸’은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고 디자이너들에게 교육과 창작 공간을 제공한다. ‘상상체험관’에는 청소년과 디자이너가 함께하는 체험공간을 마련해 미래 창의력 인재를 육성할 계획이라고 하니 <봄장>은 DDP 안에 들어갈 콘텐츠의 시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 만들어진 디자인이 아니라, 시민에게 도움이 되는 디자인으로 속을 채운다고 하니 벌써 기대된다. 비록 2014년도로 개장일은 1년 미뤄졌지만, 더 체계적인 준비와 콘텐츠 실험으로 진정 시민에게 필요한 DDP가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모든 일은 ‘돈 없는 시장 '장’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다. ‘이방인의 뫼르소’의 마음으로 시작한 나의 <봄장> 촬영기는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달시의 진심을 알게 된다는 해피엔딩처럼 무사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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