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특강]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연애편지와 유인물에서 시작된 ‘독자중심주의’

오연호 대표가 “제 인생 최초의 매체는…” 이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건 당연히 <오마이뉴스>일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중학교 3학년 때 창간한 연애편지였습니다.”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오 대표는 연애편지를 썼던 경험담으로 ‘오마이뉴스 12년과 미디어의 미래’를 주제로 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유일한 독자였던 짝사랑 그녀에게 3년간 200통에 이르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여러분은 연애편지 쓰면서 피곤해 본 적 있으세요? 아마 없을 거예요. 정성으로, 온 마음으로 쓰잖아요. 그 이후 만든 매체들도 이처럼 진심을 다했습니다.”

▲ <오마이뉴스>를 창간한 오연호 대표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에게 매체 창간 역사를 들려주고 있다. ⓒ 안형준

연애편지를 쓰면서 소설가를 꿈꾸던 소년 오연호는 꿈을 이루기 위해 국문과를 선택했다. 군사독재 시절인 83년도에 입학한 그는 시위를 하면서, 소설보다 우선 ‘사실’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유인물’이었다. 당시 그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게 만들까’였다.

그는 더 창의적인 방법을 고민했다. 유인물에 도표도 넣고 만화도 넣었다. 일반인이나 대학생뿐 아니라 중고등학생에게도 나눠줬다. 더 쉽게 쓰기 위해 ‘학우여’가 아니라 ‘그대여’로 글을 시작해, 경찰에게 ‘이건 유인물이 아닌 연애편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유인물은 조선일보 기자의 눈에 띄어 조선일보 사회면 톱 기사로 실렸다.

▲ 오 대표가 편지 쓰듯 만든 유인물은 '중학생에 편지공세'란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크게 실렸다. ⓒ 안형준

그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통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1988년 월간지 <말>의 기자가 됐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만든 <말>은 당시 불법매체였다.

“아무도 기사 쓰는 걸 가르쳐 주지 않아서, 우리끼리도 스스로를 ‘야생마’라고 부를 정도였어요. 그런 제가 나중에는 후배들을 교육할 정도가 됐죠. 내가 누구에게 배웠나 생각해봤더니 하나는 연애편지, 다른 하나는 유인물이지 뭡니까.”

보수전사 양성 대학에서 진보매체를 구상하다

<말>은 당시 교사 초봉의 3분의 1 정도로 적은 초봉을 줄 정도로 영세했지만, 그와 아주 궁합이 잘 맞는 곳이었다. 그는 <말>이 월간지였던 점과 불법매체였던 덕분에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고 기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궁합이 잘 맞아 지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말> 기자생활 5년 만에 권태기가 찾아왔다. 그는 정보화 시대에 현대적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미국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말> 잡지에 ‘워싱턴 특파원’이란 코너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말>은 경제적으로 워싱턴 특파원을 보낼 여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필 계약서를 제출했다. 자비부담을 원칙으로 하나, 회사 사정이 나아지면 차차 가능한 선에서 개선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 당시 오 대표가 스스로를 '워싱턴 특파원'으로 임명하며 직접 써낸 자필 계약서. ⓒ 오연호

그는 무작정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왜 미국은 망하지 않는지’ 취재하겠다는 거창한 명분을 가지고 떠난 특파원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아내는 식당 종업원으로, 오 대표는 라디오 해외통신원으로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러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당시 유일한 한국인 안재훈 기자를 만난 것이 미국 생활의 큰 전환점이 됐다. 그는 제대로 미국을 연구하려면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것을 권했다. 오 대표는 토플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리젠트 대학을 알게 됐다.

▲ 월간지 <말> 근무 당시 오연호 대표. ⓒ 오연호

“이곳이 미디어 전사를 길러내는 학교더라고요.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를 적으로 설정하고, 여기에 대항할 보수전사를 키우는 학교였던 거예요. 그곳에서 배웠던 그들의 전략이 역으로 지금 <오마이뉴스>를 기획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언론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2000년 <오마이뉴스>를 창간한다. 하지만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는 그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89년 <말> 기자 시절 기자실에서 쫓겨나면서 마음 속으로 외쳤던 말이었다. 그 모토를 적용해서 만든 게 전혀 새로운 개념의 매체, <오마이뉴스>였다.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닙니다. 이전부터 우리들이 조잘대기 좋아하던 것에서 나왔어요. 제주 올레길도 아주 오래 전부터 있던 걷기를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낸 거죠. 새 것은 이처럼 아주 오랫동안 우리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마이뉴스>에서 방송하는 <이털남(이슈 털어주는 남자)>이 특종을 10번이나 하면서 화제를 일으킨 비결을 소개했다. <이털남>은 시사평론가 김종배씨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로, 특히 민간인 사찰 관련 기사로 총선을 앞두고 이슈를 선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무엇보다 팟캐스트에서 인기를 끌었던 <나는 꼼수다>를 뛰어넘기 위해 <나꼼수>와 차별화하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한 회당 한 이슈만 다룰 정도로 심층적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특히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를 섭외해 담백하고 진지하게 진행한 것이 가장 큰 차별화죠. 기업들이 광고할 만큼 품위 있는 방송으로 기획하려 노력했습니다.”

<이털남>은 방송이란 올드미디어와 모바일이라는 뉴미디어가 만나 탄생했다. 오 대표는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나꼼수>가, 4ㆍ11총선에서는 <이털남>이 이슈를 만드는 데 핵심이 됐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콘텐츠가 중심을 잡아줬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오마이뉴스>는 9일간 <총선버스 411번>을 방송했다. 411번 총선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후보자와 소셜테이너를 만나 인터뷰를 생중계한 방송이다. 동시에 기사와 사진도 내보내고, SNS와 카카오톡, 전화를 통해 시청자의 질문을 받은 것이 특징이다. 오 대표는 “버스와 방송이 LTE 전국망과 스마트폰을 만나 크로스미디어로 탄생된 것”이라고 말했다.

▲ <4.11 총선버스> 외부와 내부 모습. 이는 '찾아가는 SNS 편집국'이란 참신한 기획으로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그는 총선 도중 정동영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난 탤런트 김부선씨 일화를 들려주었다. 3분 정도 할 얘기가 있다며 버스에 오른 김씨의 인터뷰가 재미있어서, 끊지 않고 40분 넘게 방송했다고 한다. 그녀를 태운 버스가 이정희 의원실을 향해 가던 중, 김씨가 그제서야 진행자에게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진행자인 오 대표가 “내가 오연호”라고 답하자 김씨가 놀랄 수밖에. 이처럼 인터뷰도 즉흥적으로 하고, 흥이 나면 버스 안 노래방 기계로 노래도 부르면서 진행했다고 한다. 그는 후발주자에게는 늘 기회가 열려있기 마련이라며 앞으로도 계속 새롭게 시도하겠다고 말했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며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저널리즘특강>은 보도와 칼럼, 방송제작, 매체창업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담론형성과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해온 분들이 진행합니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언론사의 핵심간부와 논객들이 한 특강을 <단비뉴스>가 중계합니다. 이 특강은 우리 저널리즘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도 흥미롭지만, 학생이 쓴 기사를, 함께 강의를 듣는 강좌책임교수가 데스크를 봄으로써 ‘강연ㆍ연설기사 쓰기’ 수련을 겸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특히 언론인이 되려는 학생들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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