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지난해 12월 기독교 배경의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가 현행 교과서에서 시조새 등 진화론 관련 일부 내용을 삭제하라고 교육과학기술부에 청원한 후 창조과학계와 진화론학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창조과학회 교과서위원회와 한국진화론실상연구회를 통합해 2009년 출범한 교진추는 ‘진화론은 과학이 아닌 하나의 가설’이라고 주장하며 교과서의 진화론을 공격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진화론 학자들의 모임인 ‘다윈 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는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가 지난 2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의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다윈과 진화론’을 주제로 강연한 뒤 <단비뉴스>의 인터뷰에 응했다. 최 교수는 최근 150여 년간 진화이론이 발전해 온 과정과 현대 진화이론의 핵심을 담은 <다윈 지능>을 펴냈다. 

▲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 박경현
“진화론은 과학이론, 창조론은 설화”

“과학에서 '이론'이라는 건 검증 가능한 것을 말해요. 실험을 하고 검증을 해야 비로소 하나의 이론이 되는 거죠. 창조설은 믿어야 할 종류의 것이지 과학의 영역에 가져다 댈 게 아니에요. 하느님을 대상으로 창조를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실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론’이라는 단어가 원래 정의보다 폭 넓게 쓰이는 경향이 있지만, 창조론은 이론이라기보다 창조‘설화’라는 이름 정도가 적당한 게 아닌가 싶어요.”

최 교수는 창조론이 과학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1982년 미국 아칸소 주에서 있었던 법정 논쟁을 소개했다. 당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재판을 맡은 윌리엄 오버턴 판사는 각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자연과학의 본질에 대해 방대한 연구를 했고, 판결문에서 자연과학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인간이나 종교가 만들어낸 법칙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원리를 따라야 한다. 둘째, 모든 것을 자연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실제 세계에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는 언제나 잠정적이며,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다섯째,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최 교수는 오버턴 판사가 정리한 대로 자연과학은 검증하고 반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창조론자들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며 오로지 창조의 근거만을 찾아낼 뿐, 창조론에 어떠한 회의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과학이라면 새로운 증거를 찾아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창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된다. 그래서 창조론은 과학 이론이 될 수 없다고 최 교수는 주장했다.

▲ 서울국제도서전 강연 후 <다윈지능>을 출판한 민음사 부스를 찾은 최재천 교수. ⓒ 박경현
이명박 정권에서 목소리 커진 창조론자들

지난 2006년 서울대를 떠나 이화여대로 옮기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융합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자는 취지로 ‘통섭원’을 만든 최 교수는 주변에서 통섭원의 다음 심포지엄 주제로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을 다뤄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반대했다고 말했다.

“현대 진화론의 두 거장,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는 학문적으로 앙숙이었지만 딱 한 가지 합의에 도달한 게 있었어요. 바로 창조론을 배경으로 하는 지적 설계론자들의 주장에 반응하거나 행동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지적 설계론자들이 아무리 논의의 판을 키우고 싶어도 진화론자들이 아예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 이슈가 안 될 수밖에요.”

논쟁이 계속되면 사람들이 진화론을 ‘검증된 과학적 사실’이 아닌, 창조론과 동일 선상에 놓고 다루어져야 할 이론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 교수는 과학자들이 이번 논쟁에 대응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특히나 이번 정권에서는 더 이상 논의를 키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려는 창조론자들의 노력은 1981년 한국 창조과학회 설립 후 30여 년간 계속됐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런데 이번 정권에서 일부나마 이들의 주장이 관철되고 있는 것은 ‘소망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시각이 있다.

창조과학회는 소망교회 등 대형교회들 외에도 카이스트를 비롯한 개신교 영향권의 대학으로부터 적극 후원을 받아왔다. 카이스트는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창조과학회의 창조과학전시회를 위한 공간을 제공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창조과학회를 창립한 김영길 한동대 총장에게 ‘과학기술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김 총장은 대학교육 정책에 입김이 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이기도 하다. 카이스트의 주대준 부총장은 청와대 경호처장 재직 시절 “모든 정부부처의 복음화가 나의 꿈”이라고 발언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국내 과학 연구와 교육을 대표한다는 카이스트 안에서 창조론이 줄기차게 힘을 얻는데 이의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저처럼 진화론을 연구하는 사람이 카이스트 내에 있었다면 이런 일을 두고 보지는 못했을 겁니다. 카이스트 내부의 구성도 좀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어요.”

“1등 아니라 공생하는 개체가 살아남는 게 진화론의 진정한 교훈”

▲ 최재천 교수가 서울국제도서전 인문학 아카데미에서‘다윈과 진화론’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박경현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 천 년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1,000명 중 다윈이 7위에 올랐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 분야를 넘어 인류 문명의 방향을 바꾼 위대한 발견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학, 예술, 철학 등 현대의 학문과 예술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현대인의 의식 구조와 삶까지도 바꾸어놓았다는 것이 최 교수의 주장이다.

▲ 최재천 교수의 <다윈 지능> ⓒ 사이언스북스
“우리나라에서 설문조사를 했다면 다윈은 몇 등이나 했을까요? 갈수록 많은 학문 영역에서 다윈과 진화론의 의미가 커지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다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고, 진화론의 중요성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다윈후진국'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가장 강한 종자가 살아남는다’는 식의 적자생존 개념은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최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개념이 다윈의 것으로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한다. 다윈은 가장 강한 개체만 살아남는다고 말한 일이 없고, ‘더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itter)’고 말했다는 것이다. 최고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의 적응력만 가지면 모두 공존하고 배려하며 살 수 있다는 게 진화론에 담긴 교훈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실제로 다윈의 이론은 남을 이해하고 손을 잡은 개체들이 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을 알려주죠. 공생하지 않는 생물이 살아남은 경우가 없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공존의 지혜를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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