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동현

▲ 김동현 기자
16세기 영국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 선장은 치고 빠지는 전술로 세계 최강이던 스페인 무적함대를 괴멸시킨다. 바다를 제패한 영국이 제국주의로 가는 길을 연 사건이었다.
 
20세기 후반, IT라는 망망대해에서 IBM제국이 독점하던 ‘제해권’은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라는 자유분방한 히피 집단에 의해 분산된다. IT기술 수혜자는 점점 ‘국가’에서 ‘개인’ 사용자 중심으로 바뀐다.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잡스는 애플 개발팀에 피카소의 말을 인용하며 해군보다는 해적이 될 것을 주문했다. 해적과 히피는 모두 독점을 지독히 싫어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라는 점이 흥미롭다. 대항해 시대 드레이크는 특유의 신출귀몰함으로 스페인 해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신대륙의 보물을 가득 실은 상선들을 마음껏 유린했다.
 
관료주의 IT기업이 대세를 이루던 80년대, ‘애플’호의 잡스 선장은 당시 제록스사가 개발했지만, 그 가치를 몰라 창고에 처박아뒀던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와 마우스 기술을 세상에 내놓았다. 지적재산권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야비한 행동이지만 드레이크의 노략질은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잡스의 도적질은 ‘인간 중심’ IT 세계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모든 역사의 시작은 끝을 준비한다. 스페인 해군이 영국 해적에 당했듯, 최강자로 군림하던 영국 해군은 ‘거함거포주의’만을 믿다가, 1,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해군 신형무기 유보트의 ‘무제한 어뢰공격’에 된통 당한다. 태양이 지지 않던 대영제국은 정상 자리를 미·소 신흥강국에 내주게 된다.
 
애플이 훔친 GUI 기술도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다시 날치기당해, 애플 자신이 부도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과거 장기로 삼았던 ‘기습 전술’에 되레 당했으니 업보라고 해야 하나? 애플은 이후, 아이폰, 아이패드 등 스마트기기를 앞세워 제2부흥기를 맞지만, 이번에는 강력한 지적재산권 보호를 내세워, 스마트 기술 후발주자인 구글안드로이드 진영을 극도로 견제하고 있다. ‘애플’호에 나부끼던 해골기는 어느덧 해군기로 바뀐 것이다.
 
지적재산권이 사회 발전 원동력이 되는 이유는, 창조를 위한 동기부여를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도한 독점은 경쟁을 억제해 승자독식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최종 제품을 분해해 제조과정을 역추론하는 기술을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라 한다. 가발·섬유수출 등으로 끼니를 잇던 한국을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등 첨단제품 제조국가로 도약하게 만든 비결이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국산 자동화 소총인 K2의 우수한 성능을 잘 안다. 이는 한국군 주력무기였던 미국산 M16을 ‘리버스 엔지니어링’한 제품이다. 탄생 비화는 M16 라이선스를 가진 콜트사의 과도한 독점에 있다. 지적재산권 논리를 엄밀히 들이댄다면, 한국은 유능한 ‘반칙 선수’지만, 강자가 짠 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약자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훔치기’는 국가 생존 차원만의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에이즈로 해마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에이즈 치료제의 비싼 가격만 보면, 산삼과 같은 희소 재료로 만든 게 아닐까라는 착각마저 든다. 그러나 제조비는 불과 1, 2달러 안팎. 높게 책정된 가격 이면에는 제약회사가 갖고 있는 라이선스 비용이 있다. 제약회사들은 수십년간 들인 개발연구비에 막대한 이익을 덧붙인다. 
 
그러나 과도한 지적재산권 보호에 사람의 목숨이 좌우되는 현실에서 경제 논리만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이 논리에 자유로울 수 있는 부류는 1% 부자이지, 99% 서민이 아니다. 하지만 지적재산권 보호 조처에 따라 값싼 유사약품 제조는 불법이다.
  
지적재산권 보호는 창작자에 대한 예의이자, 사회 발전 원동력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특히 영국과 애플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 또한 복제왕국인 중국을 의식해 점차 해적에서 해군의 나라로 바뀌고 있다. 기술 후진국에서 강국으로 처지가 바뀌면서 도용국의 과거를 부정하는 위치에 서게 된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지적재산권 보호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외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굶주린 어린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장발장의 행동을 마냥 비난할 수 있을까? 지적재산권 보호 논리가 양날의 칼인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미국 대학생에게 교재 무단복사 행위는 도둑질에 해당된다. 한미FTA로 저작권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서양 학문이 주를 이루는 한국 대학에서, 이미 비싼 등록금에 허덕이는 대학생에게 원서 구매 부담은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다. ‘서당 글 도둑놈 장원 급제’ 소식에 감격할 일이지 매도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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