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정헌

▲ 박정헌 기자

알다시피 최인훈의 <광장>은 집단이 강요하는 논리에 맞서 사유하는 개인의 존엄을 천명한 소설이다. 남과 북을 넘나들며 좌우 이념도 함께 넘나드는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이명준은 사유하는 개인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된 지 50년, 이명준이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투신한 지 40년이 흘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그 품 안에 사는 인간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명준이 살았던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은 정치구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식민지와 분단, 군사독재, 신자유주의를 차례로 경험한 지난 100년 동안, 한국사회를 이끈 주도적 가치는 언제나 집단주의였다. 집단은 개별성을 포기하고 보편성의 가면을 쓰고 있기 마련이라 자신의 맨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집단 없는 개인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진실일 테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는 우리가 그동안 자유와 개인이라는 가치에 얼마나 둔감했는지 보여준다. 한 집단이 형성되면 또 다른 집단이 단결해 맞서는 투쟁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쳤다. 

처음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사태가 불거졌을 때는 무덤덤했다. 그저 권력이란 불나방 속성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진보가 반성과 쇄신의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가져보았다. 썩은 살을 도려내고 진정한 진보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모범답안은 진작부터 나와있었다. 하지만 통진당 비례대표의원들은 마지막까지 자신들이 쓰고 있는 감투를 던져버리지 못했다. 그러자 정치인과 언론이 ‘너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대신 ‘너는 누구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징후적인 것은 종북과 극우라는 정치적 분리가 아니라 서로를 배제하고 인정하지 않는 이념적 증오다. 널리 알려져 있듯, 이념(Ideology)은 플라톤이 주창한 이데아(Idea)에서 유래했다. 18세기 데스튀트 드 튀라시가 ‘이데올로기 개론’에서 처음 학문적 용어로 사용할 때까지만 해도 이 낱말은 관념적 의미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데올로기에 정치적 당파성을 덧씌운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이데올로기란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 곧 계급에 의해 결정되기에 정치색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부르주아가 영위하는 허위의식이라 비난하면서도 노동자 계급에게 이데올로기적 무장을 촉구했다. 이 저항담론은 19세기 말부터 100년간 세계를 이념 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문제는 끝 모를 체제경쟁 속에서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데 있다. 대통령까지 ‘종북세력이 문제’라고 입을 열었다. 박근혜 의원은 ‘국가관’이라는 고색창연한 단어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은 ‘십자가를 밟게 해 천주교도 골라내듯’ 종북 의원을 솎아내야 한다는 중세적 믿음을 설파했다. 반대진영은 ‘현대판 매카시즘’이라는 근대적 논리를 앞세웠다. 이념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조악한 반공주의 물결에 떠밀려 역사는 퇴행하고 있다. 

국가, 민족, 가족 정체성은 한국사회를 완강히 지배해왔다. 집단에 매몰되어 우리가 온전한 우리 자신이 아닐 때, 우리는 집단의 생각 속에서 매일 죽어갈 수밖에 없다. 개인과 자유가 집단이나 이념보다 중요한 까닭이 여기 있다. 최인훈은 1960년 <광장>을 내놓은 뒤 10번을 고쳐 썼다. 이명준이 투신한 이유가 달라진 게 두드러진 내용 변화다. 초판에서 이명준의 죽음은 이데올로기적 죽음으로 묘사됐다. 작가가 손질을 한 뒤 이명준의 죽음은 사랑을 확인하는 행위로 서술된다. 최인훈은 이념 대신 사랑을 선택했다. ‘회색분자’ 이명준은 지적 냉소로 세상을 바라보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한 20대 철학도였다. 

이념 갈등에 대한 해답이 꼭 사랑이라는 말은 아니다. 개인과 자유가 세상의 전부일 리도 없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다만 ‘수꼴’과 ‘좌빨’ 운운하는 경박한 수사 안에서 우리는 개인과 자유라는 가치를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적하고 싶다. 그 가치를, 오른쪽 끝에 있는 이들은 불온하게 여기고 왼쪽 끝에 있는 이들은 손쉽게 극복해 버린다. 

민주주의는 불합리한 모순을 안아내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정화시켜 내는 능력이 있는 시스템이다. 집단이 너는 좌와 우 어느 쪽이냐고 선택을 강제하는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사랑하며 생각한다’고 무책임하게 답하는 개인이 우리사회에는 더 많아져야 한다. 불합리한 현실을 견뎌내고 극복하는 가장 큰 힘은 그런 무책임한 개인이 내리는 자유로운 결론일 것이다. <광장>과 대구를 이루는 그의 다른 소설 <구운몽>의 결말처럼.

“그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랑했을까?” “깡통. 말이라고 해? 끔찍한 소릴? 부지런히 사랑했을 거야. 미치도록. 그밖에 뭘 할 수 있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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