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의 날’ 있으면 뭐하나, 시멘트피해 주민들 외로운 상경시위

1972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인간환경회의’는 국제사회가 지구환경보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 첫 공식회의였다. 이를 계기로 6월 5일은 ‘세계환경의 날’이 됐고, 유엔환경계획(UNEP)은 매년 주제를 선정해 대륙별로 돌아가며 한 나라가 행사를 주관한다.

▲ 시멘트공장 주민들이 공해병을 호소하며 상경시위를 벌이고 있다. ⓒ 진희정

올해 ‘세계환경의 날’ 주최국은 브라질, 주제는 ‘녹색경제: 당신도 함께인가요?(Green Economy : Does it include you?)’. 세계적으로 녹색성장 논의를 주도해 온 선진국들이 그 성과를 국민들과 함께 나누고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는 취지다. ‘환경의 날’을 하루 앞둔 4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던져진 질문, ‘당신도 함께인가요?’에 지구 반대편 노인들이 응답했다. “여러분들이 저희 죽어가는 인생을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포탄 속에서 살아난 목숨이 시멘트 때문에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환경운동연합 마당에 노인 스물다섯이 모였다. 이들은 충북 제천시와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시멘트공장 인근 주민들로, 공해병 피해를 호소하기 위해 이른 아침 상경했다. ‘전국시멘트산업공해피해자대회’가 열린 것이다. 대회에 참석한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종을(85•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기념 모자와 훈장을 착용했다.

“6․25때 전장을 누비면서 그 수많은 포탄 속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시커먼 시멘(트)가루 때문에 죽는다니... 참 억울합니다.”

그는 광산이나 시멘트공장에서 일한 적이 없지만 2010년 환경부 국립환경과학원 주민건강역학조사에서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판정을 받았다. 기도가 좁아지는 이 폐질환은 폐가 굳는 진폐증과 함께 대표적인 광부병이다.

▲ 충북 제천 아세아시멘트와 강원도 영월 현대, 쌍용시멘트 공장 세 곳으로 이루어지는 삼각지대에 사는 김종을씨(사진 위).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이 환경운동연합 마당에서 시멘트 피해자들에게 전국의 피해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 진희정 

“우리 동네는 분진뿐 아니라 먹는 물도 문젭니다. 작은 동네라 산에서 흐르는 물 떠다 먹는데 시멘트공장 때문에 죄다 오염돼 가지고. 그래도 우얍니까, 그 물이라도 먹어야 되는 판인데. 재작년에 그 문제 가지고 마을 주민들이 데모도 한번 했는데 하면 뭐 합니까. 할 때 그뿐이고 뭐 고친다, 뭐 한다 말만 하지... 있긴 뭐가 있어.”

진폐증을 앓는 양금자(75•영월군 주천면 용석4리)씨는 두 차례 검사를 통해 폐암이 의심됐지만, 공부하고 있는 늦둥이 외아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 여태껏 정밀진단을 위한 입원을 마다했다. 하지만 이날 여러 지역에서 모인 공해피해자들 앞에서 양씨는 “함께라면 해볼 만하다”며 같은 마을 주민 김분남(76)씨와 함께 ‘전국시멘트산업공해피해대책위원회’ 활동을 약속했다.

이들은 피해 사실 입증 서류를 마련하기 위해 과거 영월지역 건강조사를 담당했던 인하대의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은 죽었다 하면 폐암”이라는 양씨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김씨의 남편은 지난해 말 폐암으로 사망했다.

전국 8개 시멘트공장 주민 799명 폐질환

▲ 장성군청이 파악한 피해현황과 환경부 조사보고서를 종합한 자료. 충북 제천ㆍ단양, 강원도 삼척ㆍ 영월, 전남 장성에 있는 8개 시멘트공장 지역주민 가운데 799명이 폐질환 공해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진폐증 88명, 폐암 5명, 만성폐쇄성폐질환 707명. ⓒ 환경보건시민센터 

김씨와 마찬가지로 진폐증이 악화해 폐암으로 남편을 잃은 엄춘자(70•제천시 송학면 장곡리)씨, 규폐암 의심 진단을 받고 폐 도려내는 수술까지 받았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데 산재신청 재검사에서 아무 이상 없다고 판정 받은 게 의심스러운 이은희(76•제천시 송학면 입석2리)씨, 10년간 여러 시멘트공장과 하청업체에서 잡일을 도맡았는데도 사업장들이 근무확인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산재신청에 애먹고 있는 최재수(75•단양군 매포읍 하시리)씨, 은퇴 후 귀농한 집이 하필 마을에서 시멘트공장과 가장 가까워 장독조차 성하지 않은데다 인근 초등학교 다니며 함께 사는 손자 걱정이 앞서는 김한경(70•제천시 송학면 입석1리)씨.

저마다 사연도, 피해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마땅히 피해 사실을 하소연할 곳도,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도 없자 일흔이 넘는 노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부정한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서도 거동이 불편한 김영애(81•제천시 송학면 시곡4리)씨를 비롯해, 주민 대부분이 폐질환을 앓고 있어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지만 단체로 어려운 걸음을 했다.

개인 목소리로는 역부족임을 체감한 것이다. 충북 제천과 단양, 강원도 영월에서 모인 피해주민들은 환경운동연합 마당에서 대책위를 결성하고,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과 함께 서울시내 5개 시멘트회사와 국회를 항의 방문했다.

▲ 피해주민들이 서울시내 있는 시멘트회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자 지나가는 시민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 진희정  

배상책임 회피보다 홀대가 더 야속

동양시멘트, 성신양회, 쌍용양회 등을 차례로 방문하던 대책위의 항의 목소리가 아세아시멘트 앞에서 한껏 높아졌다. 건물 앞에서 피해 사실을 밝히고 대책을 요구한 뒤 각 담당자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순서로 행사가 진행됐지만, 다른 회사와 달리 대책위 부름에 아세아시멘트 측이 응답하지 않자 피해주민들이 사내 진입을 주장한 것이다. 뒤늦게 담당자가 나와 항의서를 전달받았지만 주민들은 사측 태도에 불만을 표했다. 김정운(73․제천시 송학면 입석2리)씨는 두세 시간 들여 본사까지 찾아왔지만 주민들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사측이 야속하다.

“우리 주민들은 아세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피해배상을 떠나서 이렇게 홀대하면 안 되죠. 근무확인서 떼 달라고 해도 이리저리 회피하고. 다른 회사들은 오늘 방문한다고 하니까 밥은 자셨냐고(드셨냐고) 말만이라도 물어봅디다. 한때나마 청춘을 바쳐 일했고 마을 주민들이 희생해서 회사가 이만큼 컸으면, 어려운 시절 다 보내고 지금이라도 어느 정도 보살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배상도 배상이지만 주민들 마음을 돌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아세아시멘트공장은 지난해 12월 22일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시멘트공장 공해 피해 사실이 최초로 인정돼 주민 16명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지만 회사는 민사소송으로 맞대응했다. 이밖에도 제천시 송학면 입석리 주민들은 두 가지 법적소송에 더 얽혀있다. 지난해 분쟁위에 피해 신청한 주민 가운데 배상 결정에서 누락된 주민 40명이 아세아와 현대시멘트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하고 있고, 근로복지공단 최종심에서 산업재해보상보험 지급이 거부된 5명이 행정소송을 신청한 상태다.

▲ 주민들의 항의서한을 받은 시멘트회사 담당자들은 대책을 마련해보겠다는 원론적 방침만 반복했다.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최재수씨. ⓒ 진희정  
중앙정부기관이 인정한 시멘트산업공해피해 사실조차 공장이 책임을 회피한 채 법적소송으로 대응하고, 근로복지공단 역시 환경부 역학조사 결과와 다르게 산재를 인정하지 않다 보니 주민들 불만은 뒷짐 지고 모른 체하는 정부당국으로 향했다. 이날 오후 피해주민들은 19대 국회에 적극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했지만 워크샵 일정이 겹쳐 의원들을 직접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대책위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민주통합당 은수미, 장하나 의원실과 통합진보당 심상정 의원실 보좌관을 통해 피해 사실을 전달했다.

“한두 사람이 행동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같은 목표를 가진 우리가 그 한 가지 목적을 향해 함께 움직여야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않겠습니까?”

최광식(74•제천시 송학면 입석3리)씨는 6월 5일 ‘세계환경의 날’을 알지 못하지만 그의 외침은 2012년 환경의 날 주제를 반문하고 있다. ‘당신도 함께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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