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연대 국문과 83학번 '8312 우리들의 비밀번호'

'내 인생의 라이트모티프가 다시 들려왔다. 멀리서 나의 젊음이 내게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로 내가 무너져가고 있었다.'

25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집을 읽으며 문득 밀란 쿤데라 소설 <농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교정을 누볐을 선배들의 이야기가 까마득한 05학번인 나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소설처럼 느껴진 탓일 테다. 혹은 '맵고 흥분되는 대학의 냄새'로 기억되는 전두환 시대 한가운데 83년의 봄이 소설의 한 장면처럼 내게 걸어오고 있었던 까닭이리라.

▲ 연세 국문 83 졸업 25주년 재상봉 기념 문집. <8312 우리들의 비밀번호> ⓒ 김희진

너와 내게 부치는 편지

졸업 25년 만의 재회를 기념하기 위해 발간한 이 책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83학번 졸업생 70명 중 40여 명이 참여한 문집이다. 온라인 카페에서 근근이 소식을 이어 오다가 '졸업 25주년 기념 재상봉 행사' '국문83' 대표인 오연호(48•오마이뉴스대표)씨의 제의로 발간한 책이다. 책 제목의 '8312'는 처음 만난 해, 1983년과 졸업 후 25년이 지나 다시 만난 해, 2012년을 기억하기 위한 추억의 숫자다.

오랜 친구들에게 자기 근황을 소개하고 안부를 묻는 일종의 편지글이랄까? 집 주변 나무 이야기에서부터 가족여행 등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심오한 것도 아니다. 국문과 출신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문집에 실린 글 60여 편은 한결같이 수려하다. 시, 시조, 수필, 서평, 논문 등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도 '국문과스럽다'. 공통점이 있다면 페이지마다 친구들과 오래된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는 것.

'오월이다 다시
피어나는
여린 잎새로 노래한다
푸른 목소리로
눈시울 붉어지는 눈망울로
페드라 만미투 육교집 형제갈비에서
젓가락 두드리는 젊음 위로 막걸리
소주같이 노래한다

우리들의 청춘을
해말갛던 당신을
나를
국문 83을
가장 눈부시게 사랑했던
그 시절의 우리 모두를.....'

'다시, 83은 노래한다'(유동걸) 중에서

'보여주기 민망한' 기억의 습작들

이 문집은 사적이고 내밀한 글로 가득하다. 안부를 묻는 인사에서부터 20여 년 전 낡은 노트에 끼적인 시, 감명 깊었던 글에 대한 감상, 소논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가치관과 걸어온 길을 보여준다. 책에서 그들은 스스로 '남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글'이라고 평하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기억의 습작들을 스스럼없이 내놓았다. 어쨌든 친구들이 기쁘게 읽어줄 것이란 믿음으로 오랜 우정의 특권을 과시라도 하는 양.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으로
들리는 모든 것을 듣게 하여

사막 같은 자리에서도
샘솟는 너를 만나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뜨는 너를 보며

나, 영원히
외롭지 않은 한 사람이어라,
사랑아'

'사랑 1989'(전은미)

엄혹한 시절, 윤동주시비 앞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스무 살 시골 머슴애에겐 서울의 첫인상은 낯설고 시끄러운 도시였다.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 굴다리를 지나면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시골 촌놈의 정신을 빼앗아 가고 낯선 얼굴들이 촌놈을 더욱 무표정하게 만들었다. 학교 앞 '횡단보도 건너'는 군중과 소음의 도시 그대로였다.' (p.112 손영호)

스무 살 청년들에게 서울은 거대하고 안주하기 어려운 도시였으며 처음 맞는 대학은 한없이 낯선 공간이었다. 손영호씨는 자신을 '촌놈'이라 불러주는 선배들 속에서 처음 독립군을 만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눈 내리는 어느 월요일 오후, 그들은 윤동주시비 앞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윤동주의 <서시>를 이야기했다. 덕소 첫 엠티, 잔뜩 술에 취해 춤추고 노래하던 밤이 끝나면 아침 강가에서 나룻배를 타며 물장구를 치곤 했다.

▲ 문집에 실린 국문 83 남학우들의 사진. 진달래가 만발한 연세대 교정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연세 국문 83

그러나 대학가에서 민주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한 1983년의 대학생활이 낭만적일 수만은 없었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 가득했던 4월의 캠퍼스, 데모하는 학생들과 저지하는 전경들, 그 가운데 방황하는 수많은 자아들이 어지럽게 거리를 헤맸다. 그들이 추억하는 대학의 봄에는 그 시대 386대학생들이 겪었던 아픔과 억압, 희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대학 생활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윤동주 시비 옆 벤치는 늘 점퍼 차림의 낯선 사내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83년도에는 학내에 전경차가 들어왔고, 데모 뒤에는 도서관이나 학생회관 주위에 점점이 붉은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으며, 이른 아침 강의실 복도 구석에는 유인물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p.154 이미혜)

아련하고 부끄러운 자화상이여

'나의 대학 시절은 어둡고 긴 터널이었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에 대한 열등감으로 날마다 아침을 맞는 게 두려웠고 생기발랄한 봄이 오는 게 싫었다.' (p.93 박재연)

그래서일까? 혹은 윤동주의 후예임을 방증이라도 하는 걸까? 그들이 기억하는 '과거의 나'는 낭만과 추억보다는 부끄러움과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다. 혹독한 현실에 무방비 상태로 던져졌던 지난 날,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소시민으로, 주변인으로, 이방인으로 정의한다. 누군가는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을 변절자라 부르며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이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되레 386으로 태어나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행운이라 말한다. 우리의 대학생활이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서로에게 '고맙다'고 되뇐다. 지금부터 25년 뒤 맞이할 재상봉 행사를 기대하면서, 앞으로 쌓아 갈 사연들에 설레어 하면서. 그들의 추억은 현재진행형이다.

'한때 찬란했던 386이라는 이름은 어느 틈엔가 비아냥과 손가락질을 받는 극복의 대상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모두가 '나'를 말하는 시대에, 그래도 '우리'를 말하는 사람들. 그것이 386이고 바로 국문과 83들이라고.' (p.105 박종우)

가슴 뛰던 그 시절, 돌아갈 수만 있다면…

▲ 1983년 가을 연세대 사회과학대 앞 계단에서. ⓒ 연세 국문 83
▲ 2012년 5월 재상봉을 기념해 만난 연세 국문 83 졸업생들이 같은 장소에서 8312문집을 손에 들고 있다. ⓒ 연세 국문 83

책 앞면에는 1983년 가을 사회과학대 앞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국문83'의 사진이 있다. 그리고 2007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나란히 실려 있다. 풋풋함 대신 늘어난 주름살과 연륜이 드러나는 얼굴들을 보면서 세월의 흔적을 읽는다.

사진처럼 25년의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시인과 소설가가 되겠다고 국문과에 입학한 그들은 변호사, 대학교수, 교사, 기자가 되었다. 어떤 이는 국문과 교사자격증을 걸고 수학을 가르치다 수학예찬론자가 되었으며 어떤 이는 휴대폰 매장을 운영하며 일상 속에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꿈과 현실이 변하는 동안 두 친구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없다 해도
그 눈동자 별빛 속에 빛나네
내 맘 속에 영혼으로 살아있네’ 

먼저 떠난 친구를 추모하며 인용한 글을 보면서 나 또한 어느 날 사별해야 했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린다. 조금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에 열띤 얼굴을 한 옛 사진들 속에서 나도 가슴 뛰던 새내기 시절을 기억한다. 부끄러운 자화상 속 방황하는 자아들을 목격하며 다른 시대에 같은 고민을 한 '나'를 본다. 마음만 닿을 뿐 전화 한번 하지 못한 옛 친구들 얼굴을 되새겨 본다.

<8312 우리들의 비밀번호>는 '국문83'만이 간직한 비밀번호는 아니다. 그들의 과거에서 우리의 오늘을, 그들의 오늘에서 우리의 미래를 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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