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칼럼]

목은수 기자
목은수 기자

대학 입학 뒤 3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학교 청소노동자들이 인원 충원과 정년 보장을 요구하며 본관을 점거하여 농성에 들어갔다. 나는 농성장에 찾아가 밥을 나누고 커피를 마셨다. 오가며 눈인사만 나눴던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해골 두 쪽 나도~’ 같은 과격한 가사가 담긴 민중가요를 처음 듣고 너무 놀랐다고 어느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박완서 작가의 소설 <나목>을 좋아한다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청소노동자와 본격 문학의 조합이 낯설었지만, 그게 나의 오랜 편견이라는 걸 깨닫고는 이내 부끄러워졌다.

폭력적인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는 청소노동자들은 그동안 강의실 청소만 한 것이 아니었다. 캠퍼스 곳곳의 풀을 뽑는 데 수시로 동원됐다고 했다. 현장 반장에게 밉보이면 힘든 장소를 떠맡아 청소하게 된다고도 말했다. 노조를 결성한 뒤 그런 일은 사라졌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고되게 일하며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기 농성의 이유였다. 86일에 걸친 농성 이후 마침내 학교는 청소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했다. 소식을 들은 청소노동자들은 웃다가 울었고, 울면서 웃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대학가에서 청소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이 연쇄적으로 설립됐다. 사진은 2017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비정규직없는세상 청소노동자의 봄’ 행사. 연합뉴스
2000년대 중후반부터 대학가에서 청소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이 연쇄적으로 설립됐다. 사진은 2017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비정규직없는세상 청소노동자의 봄’ 행사. 연합뉴스

그 일은 나에게 기자의 꿈을 심어줬다. 다른 세계에 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의 가치를 생각하게 됐다. 더 넓은 세계에서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방법을 고민했다. 기자가 된다면 좋겠다는 꿈을 꾸게 됐다. 저널리즘 대학원에 진학해 기자 공부를 하게 된 것도 2018년 청소노동자들의 농성 덕분이었다.

얼마 전, 그 대학을 모처럼 찾아갔다. 농성장에서 만나 친해진 한 청소노동자를 다시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옛 추억을 나누리라 생각했다. 어설픈 기자의 꿈을 단단히 내려치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모처럼 마주 앉은 아주머니는 농성 당시 노조에 답지한 성금과 물품을 전부 자신이 관리했다고 자랑했다. 응원해 준 학생들 덕분에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며 고맙다고도 말했다. 학교 당국을 은근히 탓하는 ‘뒷담화’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머니는 주저하며 덧붙였다. “사실 그때 직접고용을 주장한 게 좀 후회스러워.”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당황스러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직접고용으로 전환된 이후 청소노동자의 고용과 노동 조건은 더 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학교는 용역업체와 계약 맺지 않는 대신 직접고용한 청소노동자의 실질 임금을 오히려 삭감했다. 용역업체를 통해 간접고용됐던 시절엔 71살까지 일할 수 있었지만, 대학 직원 신분이 되니 60살이 되면 무조건 퇴직하게 됐다. 규정 때문인지 보조금 때문인지 분명치 않은 이유로 장애인 노동자가 늘어났는데, 그들이 청소한 자리를 두세 번 청소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그런 일을 바꾸거나 고치려 해도 이젠 노조의 힘이 사라졌다. 장기 농성 과정에서 노조 간 갈등이 격화됐고, 이후 노조원 수가 줄어들면서 학교 측과 교섭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주머니는 씁쓸하게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나는 그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고, 타인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그게 기자의 일이라 생각했다. 아주머니와 이야기 나눈 뒤에 다시 깨달았다. 직접고용을 주장하는 노조원의 말을 그저 듣고 옮기는 건 기자의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외치는 ‘직접고용 쟁취!’라는 구호의 맥락을 파헤치고 분석하고 톺아보는 게 기자의 진짜 일이었다. 그게 내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

최근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시급 인상과 휴게시설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어느 언론은 나의 모교를 모범사례로 소개하면서 ‘청소노동자 직접고용 이후 학내 갈등이 사라졌다’며 직접고용이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보도했다. 그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사에 적힌 ‘근본’이라는 단어를 보며 생각했다. 근본을 의심하고 세상의 본디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려고 분투하는 게 저널리스트의 근본일 것이라고.

* 이 글은 <넥스트 리터러시 리뷰> 11월 11일 자에 실린 ‘네트워커 칼럼’을 언론사의 허락아래 전재하면서 그 일부를 고쳐 다듬은 것입니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