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시간 늘어지고 자기계발 압박까지…숨 막히는 직장인들

정재혁(30•가명)씨는 A중공업에 입사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신입사원이다. 정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넘게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다 포기하고 취업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학점과 영어공인(토익)점수, 봉사활동 등 ‘스펙’을 쌓느라 쫓기는 삶을 살았는데, 이젠 한 숨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무언가를 위한 자격 갖추기에 연연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그간 미뤄두었던 일, 배우고 싶었던 것을 하며 살아야지 기대했죠. 여행도 하고요.”

그러나 직장에선 새로운 ‘자기계발의 압박’이 시작됐다. 영어나 중국어 등 어학 실력, 프레젠테이션(발표) 능력, 각종 컴퓨터 프로그램 활용과 자격증 취득 등 사내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의무적으로 치르는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등 소프트웨어 활용능력 시험은 인사고과에 반영돼 승진이나 연봉 협상 자료로 이용된다. 한 달에 한 번씩 나가는 봉사 활동도 마찬가지다.

“회사에 매년 어학성적표를 제출해야 해요. 봉사 활동마저도 결국 인사고과에 반영되니 자발적 참여라기보다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기분이 들고요.”

퇴근 후 짬을 내 하고 있는 토익과 컴퓨터 관련 공부 역시 즐겁지 않다.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회사가 제시한 요건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정씨는 “어쩌다 일찍 퇴근하면 쉬고 싶지만 어학이나 자격증 공부에 소홀하면 무능한 사람 취급 받으니까 이것저것 많이 하려고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 한 직장인이 서울 종각역 지하도에서 토익 관련 광고판을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다. ⓒ 최종철

정씨처럼 대학시절을 취업 준비 등으로 여유 없이 보낸 뒤 막상 직장인이 된 후에도 자기계발의 미명아래 또 다른 ‘스펙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회사원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 등이 직장인 635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2010년 한해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한 일이 있다고 답한 직장인이 전체의 66.6%에 달했다. 자기계발을 위해 공부한 분야는 ‘영어’가 37.8%, ‘업무관련 전문지식’이 34.3%였다. 복수응답인 이 조사에서 ‘컴퓨터 능력’, ‘업무 외 자격증’, ‘업무관련 자격증’ 등이 각각 20.3%, 17.0%, 14.9%의 응답률을 보였다.

‘살아 남으려면 배워야’ 압박 시달리는 직장인

박모래(29•여•가명)씨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B무역회사에 다니는 3년 차 직장인이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박씨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회사 출근 전 매일 오전 6시에 수강하는 어학 수업이 부담스럽다. 무역업무 때문에 외국어가 필수라 열심히 하는데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수업 들으려면 한 시간 전에는 일어나야 하거든요. 그리고 오전 8시까지 출근해서 밤 10시까지 회사에 있는 편이에요.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영어 공부하고 회사 업무를 마저 처리하다 보면 하루에 4~5시간 자려나? 친구들과 전화로 이야기 나눌 여유도 없어요.”

박씨는 입사하자마자 매일 아침 영어 수업을 받고 야근도 적극적으로 한 덕분에 2년 만에 대리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장으로 빨리 승진하기 위해 앞으로 3년 간은 지금과 같은 생활패턴을 유지할 계획이다. 그는 회사 생활에 성공하기 위해 남자친구와의 결혼도 미루고 있다고 한다. 주 5일 근무가 원칙이지만 격주로 토요일에도 일하기 때문에 친구들 모임에 자주 빠졌더니 이젠 연락이 없고, 두 달에 한 번 정도 찾아 뵙는 부모님도 섭섭해 한다고. 하지만 그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 받아 빨리 자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 커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C기업의 3년 차 연구원인 강성민(33•가명) 대리는 입사 후 별다른 자기계발을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강씨는 그래서 현재 석사 학위가 있지만 승진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경영학석사(MBA)학위에 도전하고 스페인어도 배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직장인들이 이렇게 업무 외에 자기계발의 부담을 느끼면서 여가와 취미생활, 가족이나 친구와의 시간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 2010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근로시간은 연 1749시간인데 반해 우리나라 노동자의 근로시간은 2193시간으로 ‘장시간근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업무에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 뒤에 또 다시 ‘스펙’을 위한 공부에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이다.

 

▲ 취업포털 인크루트에서 조사한 일주일 동안 직장인이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시간. ⓒ 이준석

지난해 11월 취업•인사포털 인쿠르트가 직장인 3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직장인 자기계발 현황’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84.9%가 일주일에 적어도 1시간 이상, 많게는 6시간 이상 자기계발에 투자하고 있다고 답했다.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1~3시간’이라고 답한 사람이 48.4%로 가장 많았고 ‘6시간 이상’이 19.8%, ‘4~6시간’이 16.7%의 순이었다.

노동 시간 단축과 자기 계발 목적에 대한 성찰 필요

장시간근로에 이어 자기계발 부담에 시달리다 보니 직장인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달 24일 남녀 직장인 561명을 대상으로 ‘자기계발 스트레스 현황’에 대해 조사했더니 응답자 중 85.4%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답했다. 자기계발 활동 중 가장 큰 애로사항을 묻는 질문에는 33.8%가 ‘과중한 업무량에 따른 시간부족’이라고 답했다.

한국노동연구소 배규식 노사사회정책연구 본부장은 “지금 20, 30대 직장인들은 과도한 노동 시간과 자기계발 때문에 문화생활 등의 여유가 없고 이 때문에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며 “근본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배 본부장은 “노동시간이 길다고 해서 경쟁력이 높아지는 게 아니며 오히려 집중력과 창의력이 떨어져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정부가 주 40시간인 법정근로시간 준수를 감독해야 하며 노조도 노동시간 줄이기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근로시간이 줄면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 투자도 상대적으로 여유 있게 할 수 있다는 취지다.

 

▲ 대형서점의 자기계발 코너에 진열된 관련 서적들. ⓒ 최종철

직장인들이 자기계발의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진짜 공부는 서른에 시작된다>의 저자인 이창준 구루피플즈 대표는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 경쟁력을 갖지 않으면 자리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불안감 때문에 스스로를 스펙 쌓기에 내몰고 있다”며 “자기의 꿈을 실현하는 게 아니라 수치화된 객관적 성취로 안위를 얻으려 하기 때문에 성공하더라도 공허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이 대표는 “스스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내면의 잣대를 기준으로 인생을 계획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주도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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