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제4회 제주퀴어문화축제 르포

퀴어(Queer). 기묘하고 괴상하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성소수자를 낙인찍으려는 의도로 사용됐다. 성소수자들은 이를 뒤집었다. 스스로 퀴어라 불렀다. 그러자 ‘개념의 전복’이 일어났다. 이제는 성소수자 전체의 자긍심을 표현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손가락질 앞에서 오히려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는 자리가 ‘퀴어문화축제’ 또는 ‘퀴어퍼레이드’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0년 처음 열렸다. 올해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5개 도시에서 차례로 열렸다. 지난 10월 22일, <단비뉴스>는 올해 마지막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제주를 찾았다. 행사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의 신산공원에서 열렸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에 위치한 신산공원 광장 울타리에 강정마을살이 단체인 ‘피스파인더’가 걸어놓은 무지개 현수막(왼쪽)과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내건 환영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있다. 김아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2동에 위치한 신산공원 광장 울타리에 강정마을살이 단체인 ‘피스파인더’가 걸어놓은 무지개 현수막(왼쪽)과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내건 환영 현수막이 나란히 걸려있다. 김아연 기자

신산공원은 쫓겨나고 밀려난 사람들이 살던 자리에 있다.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육지의 군경은 신산마루 일대의 주민을 체포하거나 고문하거나 죽였다. 마을은 폐허가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피난민들이 제주에 몰려왔다. 제주시는 아무도 살지 않던 신산마루 주변에 이들을 정착시켰다. 피난민들은 돌담의 잔해를 주워 집을 지었다. 1970년대 군사정부는 이 마을을 허물고 재개발했다. 피난민은 철거민이 되어 저항했으나 결국 쫓겨났다. 이제 신산공원에는 4·3 해원 방사탑, 6·25 참전 기념탑 등이 들어서 쫓겨난 사람들을 회고한다. 퀴어 문화축제가 열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을 것이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축제

행사 시작을 1시간 앞둔 오전 10시 30분, 신산공원의 광장을 둘러싸는 울타리가 설치됐다. 마름모꼴의 행사장을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 하나만 남겨놓고 주변을 모두 막았다. 조직위원회 소속 관계자들이 울타리를 꼼꼼하게 점검했다. 출입구 앞에는 경찰 10여 명이 지키고 섰다. 

제주퀴어문화축제 행사장 울타리에 무지개 깃발이 꽂혀 있다. 퀴어를 표현하는 무지개는 모두 6개의 색으로 구성된다. 빨강은 삶, 주황은 치유, 노랑은 햇빛, 초록은 자연, 파랑은 화합, 보라는 정신을 뜻한다. 김아연 기자
제주퀴어문화축제 행사장 울타리에 무지개 깃발이 꽂혀 있다. 퀴어를 표현하는 무지개는 모두 6개의 색으로 구성된다. 빨강은 삶, 주황은 치유, 노랑은 햇빛, 초록은 자연, 파랑은 화합, 보라는 정신을 뜻한다. 김아연 기자

출입구 앞에는 무지개 깃발과 무지개 천이 내걸렸다. 성소수자들은 이를 ‘프라이드 플래그’(pride flag)라 부른다. 삶, 치유, 햇빛, 자연, 화합, 정신을 뜻하는 6개 색깔의 무지개 깃발은 성소수자의 지향과 더불어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2022년 한 해 동안, 이 깃발이 공개적·집단적으로 거리에 내걸린 것은 제주를 포함해 모두 5차례다. 7월 16일 서울, 9월 17일 춘천, 10월 1일 대구, 10월 15일 인천, 10월 22일 제주 순으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처음부터 전국 곳곳에서 열린 것은 아니다. 2000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제1회 서울퀴어문화축제 이후 오랫동안 ‘프라이드 플래그’의 행진은 오직 서울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2009년 대구, 2017년 부산과 제주, 2018년 전주, 인천, 광주, 2019년 창원, 2021년 춘천에서 각 지역의 특색을 살린 퀴어문화축제가 차례로 시작됐다.

비교적 역사가 오래된 서울과 대구를 제외하면, 모든 지역이 매년 축제를 개최했던 것은 아니다. 예산 문제, 인력 문제, 행정 차별로 인한 장소 섭외 문제 등 갖가지 어려움 때문에 행사를 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어느 지역에서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꾸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각 지역의 조직위가 십시일반으로 힘을 보태주기도 했다.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이번 행사를 위해 서울과 부산의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로부터 물품 대여와 협찬을 받았다고 공식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에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오전 11시, 축제를 즐기려는 이들이 행사장 입구 주변에 모여들었다. 어느 20대 남성은 한 손에 돗자리, 다른 한 손에 ‘셀카봉’을 들고 왔다. 일행 없이 혼자 카메라를 목에 걸고 온 사람도 있고, 여러 친구와 함께 온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는 연인과 팔짱을 끼고 웃었고, 다른 이는 반려견과 함께 천천히 걸어왔다. 출입구 주변에 서 있는 경찰 인력도 10여 명에서 30여 명으로 늘었다.

전교조 제주지부 여성위원회는 ‘나는 이런 학교 다니고 싶다’를 주제로 즉석 설문조사를 벌였다. 응답자들이 작성한 메모지에는 ‘모두가 편안한 학교’, ‘성중립 화장실이 있는 학교’, ‘공포와 불안 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라고 적혀있다. 김아연 기자
전교조 제주지부 여성위원회는 ‘나는 이런 학교 다니고 싶다’를 주제로 즉석 설문조사를 벌였다. 응답자들이 작성한 메모지에는 ‘모두가 편안한 학교’, ‘성중립 화장실이 있는 학교’, ‘공포와 불안 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라고 적혀있다. 김아연 기자

오전 11시 30분, 행사장의 출입구가 열렸다. 행사장에는 조직위원회, 전교조, 정의당, 녹색당, 여민회, 그 밖의 크고 작은 단체들이 마련한 13개의 부스가 마련돼 있었다. 사람들은 부스를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전교조 제주지부는 각자가 꿈꾸는 학교를 적어보게 했다. 제주여민회는 제주여성영화제를 소개했다. 정의당은 무지개 스티커를, 녹색당은 무지개 부채를 나눠줬다. 어느 부스에서는 타로점을 봐줬고, 다른 부스에서는 직접 구운 빵을 팔았다.

‘피스파인더’ 부스 운영자가 폐박스에 색연필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며 홍보물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제주퀴어문화축제에는 13개 단체의 부스가 마련됐다. 김아연 기자
‘피스파인더’ 부스 운영자가 폐박스에 색연필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며 홍보물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제주퀴어문화축제에는 13개 단체의 부스가 마련됐다. 김아연 기자

이들은 왜 여기에 왔을까. 제주여민회 부스 운영자인 활동명 '기쁨' 씨가 말했다. “제주도가 여자들의 섬이라지만 여전히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지요. 여민회에도 퀴어 정체성을 가진 회원이 있어요. (차별에 반대하고 퀴어와 연대하려고) 이렇게 축제에 참가했지요.” 

부스 주변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적었다. 조직위가 나눠준 분필로 행사장 바닥에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렸다. ‘제주 퀴퍼를 위해 육지에서 왔어요’, ‘멋쟁이 토마토 왔다 감’, ‘차별금지법은 언제?’와 같은 글을 사람들은 여러 색깔로 적었다.

한 참가자가 아기를 안고 행사장에 마련된 녹색당의 부스를 구경하고 있다. 김아연 기자
한 참가자가 아기를 안고 행사장에 마련된 녹색당의 부스를 구경하고 있다. 김아연 기자

행사장에 마련된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이달의 소녀의 ‘버터플라이’, 트와이스의 ‘필 스페셜’ 등이었다. 아무렇게나 선곡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 노래에는 공통점이 있다. 퀴어를 지지하는 가수가 부른 노래이거나, 가사에 성별 지칭어가 등장하지 않는 노래였다.

예를 들어, 레드벨벳의 ‘퀸덤’이라는 노래는 ‘비가 내려도 Strong and beautiful. 모두 다른 색깔로 완성한 Rainbow’라는 가사를 갖고 있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특히 소녀시대의 데뷔곡인 ‘다시 만난 세계’는 2007년부터 매년 전국 모든 퀴어문화축제에서 흘러나온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당신이 어떤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부른 소녀시대의 멤버 티파니는 드랙 아티스트들이 만든 유튜브 채널 ‘네온밀크’에 지난해 출연해 성소수자를 향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 늘 ‘이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어요. 하지만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솔직하고 자신답게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과 친절이 항상 이긴다는 걸 보여준 여러분 감사합니다.”

레위기 20장 13절

울타리로 둘러싸인 공간이 평온과 평화로 채워지는 동안, 출입구 바깥에선 긴장이 시작됐다. 오전 11시 30분, 행사 시작에 맞춰 일련의 시위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행사장 출입구로부터 1m 간격으로 늘어섰다. 저마다 손에 한두 개의 피켓을 들었다. ‘동성애 반대’, ‘NO 차별금지법’, ‘사랑하니까 반대합니다’ 등이 적혀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여성도 보였다. 그가 펼쳐 든 현수막에는 성경 구절이 적혀있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위기 20:13) 축제 참가자들이 곁을 지나면, 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동성애는 치료될 수 있다!”

제주퀴어문화축제 행사자의 출입구 앞 산책로에 반대 집회 참가자 6명이 1m 간격으로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피켓에는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STOP 동성애! 차별금지법!’이라고 적혀있다. 김아연 기자
제주퀴어문화축제 행사자의 출입구 앞 산책로에 반대 집회 참가자 6명이 1m 간격으로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피켓에는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STOP 동성애! 차별금지법!’이라고 적혀있다. 김아연 기자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등장하자 조직위원회도 조금 분주해졌다. 조직위 관계자는 주변에 서 있던 경찰을 불렀다. 세 명의 경찰이 조직위 관계자와 이야기 나누는 동안, 다른 경찰 한 명은 성경 구절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는 여성에게 다가가 무엇인가 이야기했다. 여성은 이내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린 어느 단체에서 돈 받고 나온 거 아니에요! 다 각자 1인 시위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동성애 이거 불법 아니에요? 경찰이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예요?” 여성은 1m 떨어진 다른 참가자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 않아요?” 옆에서 동성애 반대 피켓을 들고 있던 중년 남성이 호응했다. “옳소! 맞습니다. 회개합시다!”

모다들엉, 모두를 환영해

그들로부터 축제 참여자를 보호하는 울타리 안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낮 12시 15분, 제4회 제주퀴어문화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환영사와 연대사 발언이 시작됐다. 행사장 안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 발언자들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무대 앞 바닥에 모여앉았다.

활동명 ‘홀릭’으로 불리는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이 말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과 대구밖에 없었는데 많은 지역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모습을 보고 성소수자의 삶이 덜 외로워졌습니다. 이곳 제주에서 2022년 마지막 퀴어문화축제를 마치면서 모든 것을 잘 마무리하는 장이 마련된 것 같습니다.”

이하람 부산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도 마무리의 장소가 제주여서 행복해 보였다. “제주퀴어문화축제 하면 떠오르는 말들이 있습니다. ‘동네잔치 같다’, ‘정감 있다’. 편안한 특유의 분위기가 제주다움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성소수자의 1년을 마무리하는 정감 있는 동네잔치라는 취지는 이번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행사 이틀 전 조직위의 활동가 현태림 씨는 제주MBC 라디오 프로그램 <라디오 제주시대>에 출연해 이번 행사의 구호인 ‘모다들엉 퀴어의 섬’에 대해 설명했다. “맘껏 외치고 투쟁하는 하루가 필요하듯, 모두 모여 안부를 전하고 서로를 챙기는 일상 같은 하루도 필요합니다. ‘모다들엉’은 모두 모여보라는 뜻의 제주도 사투리입니다. 힘들었을 소수자, 그리고 모두를 환영하는 건강하고 따뜻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슬로건을 정했습니다.”

안부를 묻는 따뜻한 자리가 왜 필요한지, 다른 퀴어 행사에 참가해본 이들은 안다. 인천에서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2018년,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대거 몰려와 폭력을 휘둘렀다. 국내 퀴어문화축제 사상 처음으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지난 10월 열린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도 긴장감이 높았다. 이혜연 인천퀴어문화축제 공동 조직위원장은 <단비뉴스>와 인터뷰에서 “올해 인천퀴어문화축제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시종일관 긴장 상태에서 행사를 진행한 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행사를 열었던 서울도 제주와는 다르다. 이번 제주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어느 20대 후반 여성은 기자에게 말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재밌긴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주는 한적해서 좋아요. 야외에서 벌어지는 뮤직 페스티벌에 온 것 같아요.”

오후 3시, 금빛 의상을 입은 드랙 아티스트 ‘허리케인 김치’가 축하공연을 끝낸 뒤 인사하고 있다. 김아연 기자
오후 3시, 금빛 의상을 입은 드랙 아티스트 ‘허리케인 김치’가 축하공연을 끝낸 뒤 인사하고 있다. 김아연 기자

서로를 위로하는 말이 오간 뒤에는 위로의 공연이 펼쳐졌다. 오후 1시, 어쿠스틱 듀오 ‘여유와 설빈’이 노래를 불렀다. 뒤이어 드랙(drag) 아티스트 ‘허리케인 김치’가 공연했다. 성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화장과 옷차림, 퍼포먼스 등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를 드랙 아티스트라 부른다. 진한 화장과 금빛 의상을 입은 그의 등장에 무대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울타리 밖을 지나다가 그 공연을 보려고 일부러 행사장에 들어와 앉은 중년 남성도 있었다.

이 무렵, 행사 참가 인원은 10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비퀴어 시민, 아이와 함께 방문한 이성 커플, 외국인 관광객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모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축제를 즐겼다. 얼마 전에 돌잔치를 치렀다는 어린아이는 반려견과 함께 바닥을 기어 다니며 장난을 쳤다. 흰머리의 중년 여성 두 명은 손을 잡고 앉아 환하게 웃었다. 졸업 여행으로 제주를 찾은 서울의 대안 학교 학생들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챙겨온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오후 3시 30분, 약 200여 명의 경찰들이 행사장 출입구 산책로의 양쪽에 서서 곧 시작할 퍼레이드에 대비하고 있다. 김아연 기자
오후 3시 30분, 약 200여 명의 경찰들이 행사장 출입구 산책로의 양쪽에 서서 곧 시작할 퍼레이드에 대비하고 있다. 김아연 기자

축하공연이 끝나자 퀴어퍼레이드가 임박해 왔다. 신산공원에서 시작해 제주시청 앞 광장을 돌아오는 1시간 30분 정도의 코스가 예정돼 있었다. 퀴어문화축제에서 행진이 빠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1년 365일 가운데 364일 동안 자기 정체성을 가리고 숨어 지내는 성소수자들이 단 하루라도 자긍심을 갖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퀴어퍼레이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후 3시 30분, 곧 퍼레이드가 진행될 것이라고 조직위가 방송으로 알렸다. 이내 출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200여 명의 경찰이 출입구 앞 도로의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녁이나 졸바로삽서

퍼레이드 참가자들이 깃발, 피켓 등을 머리 위로 흔들고 있다. 박스 피켓에는 제주도 사투리로 ‘나신디 신경 끄고 이녁이나 졸바로삽서’라는 글이 적혀있다. 표준어로 ‘내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똑바로 살아’라는 뜻이다. 김아연 기자
퍼레이드 참가자들이 깃발, 피켓 등을 머리 위로 흔들고 있다. 박스 피켓에는 제주도 사투리로 ‘나신디 신경 끄고 이녁이나 졸바로삽서’라는 글이 적혀있다. 표준어로 ‘내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똑바로 살아’라는 뜻이다. 김아연 기자

오후 4시,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참가자는 300여 명으로 늘었다. 축하 공연을 즐기던 이들에 더해, 퍼레이드 시작에 맞춰 신산공원을 찾아온 이들이 많았다.

행진은 8차선 도로 가운데 4차선을 차지한 채 시작됐다. 그 4개 차선의 안팎으로 기묘하고 괴상한 행렬이 만들어졌다. 조직위가 준비한 트럭과 승합차 뒤로 4열로 늘어선 참가자들이 걸었다. 행진 참가자들의 오른쪽과 왼쪽에 경찰이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경찰에 막혀 차도에 내려서지 못한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인도를 따라 걸었다.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휠체어 이용자와 아이들은 행렬의 가운데서 걸었다. 비장애인과 성인은 행렬의 양옆과 앞뒤에서 걸었다. 그들은 차량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앞서 신산공원에서 들었던, 성소수자에게 우호적인 노래들이었다. 가사를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 현장을 어떤 이는 소셜미디어로 중계했고, 다른 이는 영상으로 촬영했다.

그러다 간간이 함께 외쳤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우리는 여기에 있다”, “퀴어가 여기에 있다”, “퀴어가 살고 있다.” 구호에 맞춰 깃발과 피켓이 흔들렸다. 어느 피켓에는 ‘나신디 신경 끄고 이녁이나 졸바로삽서’라고 적혀있었다. 표준어로 번역하면, ‘내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똑바로 살아’라는 뜻이다.

퍼레이드 행렬의 오른쪽 인도에서 반대 시위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피켓에는 ‘에이즈치료 한달600만원’, ‘혐오금지는 동성애를 장려한다’, ‘가짜 평등, 가짜 인권, 가짜 혐오’, ‘우리 모두 엄마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어요’등이 적혀있다. 김아연 기자
퍼레이드 행렬의 오른쪽 인도에서 반대 시위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피켓에는 ‘에이즈치료 한달600만원’, ‘혐오금지는 동성애를 장려한다’, ‘가짜 평등, 가짜 인권, 가짜 혐오’, ‘우리 모두 엄마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어요’등이 적혀있다. 김아연 기자

인도에서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퍼레이드 행렬을 따라 걸었다. 어떤 이는 기도문을 외우며 걸었다. 또 다른 이는 나무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걸었다. 행렬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회개하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행렬을 실시간으로 촬영하여 중계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도 손마다 피켓을 들었다. ‘NO 동성애 NO 차별금지법’, ‘에이즈치료 한 달 600만원’, ‘동성애 유전자X’, ‘음란한 축제 반대한다’ 등의 글이 적혀 있었다.

오후 4시 40분, 퍼레이드 행렬이 제주시청 별관 앞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 앞에 20여 명이 모여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찬송가를 합창하고 있었다. ‘오직 주 예수 사랑합니다’라는 가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합창 가운데 연신 외쳤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돌아오십쇼!”

그들 앞에 이른 퍼레이드 참가자 가운데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10대 여성 청소년 3명이 있었다. 그 가운데 누군가 말했다. “내 친구 저기 있는데?” 합창단 가운데 학교 친구가 있는 듯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학생이 말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저기 있을걸?” 그들은 까르르 웃었다.

높아진 찬송가 소리에 용기를 얻은 것인지 반대 집회 참가자 가운데 한 명이 폭언과 폭력을 시작했다. 퍼레이드 행렬을 따라 걸으며 담배를 피우던 어느 30대 남성이 취재 중이던 <단비뉴스> 기자에게 불쑥 다가왔다. 기자의 목에 걸린 기자증을 힐긋거리며 그가 말했다. “프레스? 저거 기자라는 뜻 아니야?” 기자가 쳐다보자 그는 욕했다. “뭘 야려, 시X년아.”

뒤이어 그는 퍼레이드에 참여 중이던 어느 외국인 남성을 향해 소리쳤다. “시X, 더럽게 뭐냐? 여기 왜 왔냐?” 30대 남성은 그 외국인에게 바싹 붙어 걸으며 연신 “야, 여기 왜 왔냐?”고 말했다. 그러다 주먹 쥔 손으로 외국인의 팔을 때렸다. 그제야 경찰 3명이 욕하며 주먹질하는 30대 남성을 붙잡아 제지했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외국인 남성은 어깨를 으쓱했을 뿐, 폭언과 폭력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걸었다.

신산공원 입구로 들어가는 앞 행렬이 뒤 행렬과 마주하자 환호를 주고받고 있다.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제공
신산공원 입구로 들어가는 앞 행렬이 뒤 행렬과 마주하자 환호를 주고받고 있다.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제공

오후 5시, 퍼레이드가 막바지로 향하던 무렵, 도로 통제가 조금 풀렸다. 행진 참여자도, 그 행진의 반대자도 아닌 일반 시민들이 행렬을 바라보았다. 어느 시민은 시끄럽다는 듯 귀를 막고 인상을 쓴 채 걸어갔다. 막 예식을 끝낸 어느 신혼부부는 한복차림으로 손을 흔들어 행렬에 인사했다. 카페에 앉아있던 시민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내년에도 ‘다시 만난 세계’를 노래하길

오후 5시 30분, 행진 참가자들이 신산공원에 돌아오며 퍼레이드가 끝났다. 행진을 마무리하는 노래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왔다. 유아차를 끌고 행진을 완주한 부부, 대형 무지개 깃발을 망토처럼 두르고 신나게 뛰어 들어오는 젊은 남성, 학교 가는 날이 아니지만 일부러 교복을 입고 참여한 중고등학생들까지 모두 어울려 마지막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 관계자가 신산공원의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이 즐겁게 함께 해주어 행복했습니다. 내년에 한 명씩 더 데리고 와주면 좋겠습니다. 계속해서 확장합시다.”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제주 신산공원 광장 바닥에 참가자들이 적어둔 글이 남았다. ‘민주당 차별금지법 안 하고 뭐 하냐?’, ‘사랑에 틀린 게 어디 있어!’, ‘차별은 메롱’, ‘하이 퀴어 파이팅’이라고 적혀있다. 김아연 기자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제주 신산공원 광장 바닥에 참가자들이 적어둔 글이 남았다. ‘민주당 차별금지법 안 하고 뭐 하냐?’, ‘사랑에 틀린 게 어디 있어!’, ‘차별은 메롱’, ‘하이 퀴어 파이팅’이라고 적혀있다. 김아연 기자

행진이 끝나고 축제도 막을 내렸다.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은 부스와 현수막을 철거했다.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주시민은 자기 집으로, 외국인 관광객은 남은 여행 일정을 따라 공원을 떠났다. 육지에서 온 사람들은 숙소나 공항으로 걸음을 옮겼다.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곳마다 찾아가 반대하던 여성도 성경 구절이 적힌 현수막을 허리 가방에 접어 넣고 생수병을 챙겨 공원을 떠났다.

이날 기상청은 제주 북부 지역에 비가 올 것이라고 예보했다. 행사 내내 그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신산공원 바닥에 적힌 형형색색의 글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누군가 하얗고 빨갛고 노랗게 적어 뒀다. 사랑에 틀린 게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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