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그날 밤 체르노빌

그날 밤 체르노빌/애덤 히긴보덤 지음, 김승진 옮김/이후/3만2000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는 1986년에 발생했다. 폭발 사고가 난 지 36년이 지났지만 여파는 여전하다. 최근에는 피부색이 검은 개구리가 원전 근처에서 발견됐다. 지난 4월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최고안전기술자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발전소를 점령한 러시아군이 상당한 양의 방사능에 피폭됐을 거라고 말했다. 관련 서적도 꾸준히 나온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다룬 책은 국내 서점에만 20권 가까이 있다.

<그날 밤 체르노빌>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하다. 체르노빌에 관한 자료를 총망라했다. 저자인 영국 저널리스트 애덤 히긴보덤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 20주년인 2006년 영국 <가디언>이 발행하는 주간지 <옵서버>의 의뢰를 받아 취재에 착수했다. 체르노빌을 방문해 관련자를 인터뷰하고 조사 보고서와 논문, 재판 기록과 같은 공문서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편지와 일기, 사진과 회고록 등의 일상적 기록물도 방대하게 수집하고 조사했다. 사고 발생 30주년인 2019년 또다시 러시아를 방문해 추가로 취재한 뒤 13년 동안의 취재물을 묶은 것이 이 책이다.

방대한 취재에 바탕을 둔 이 책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배경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전체 20개의 장 가운데 폭발 당시를 다룬 장은 6장 하나뿐이다. 1장부터 5장까지는 소비에트연방의 성급한 원자력 개발 사업과 주먹구구식 원전 건설 과정을 보여준다. 7장부터는 폭발 이후의 당국의 어설픈 대처, 소방대원과 군인들의 영웅적 면모, 사고를 덮으려는 관료들을 드러낸다. 일련의 과정에서 소련의 비밀주의와 관료주의가 어떻게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촉발했고, 이것이 또 어떻게 소련 해체로 이어지게 됐는지 설명한다.

2021년 국내에 번역 출판된 이 책은 방대하고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쓰였다. 출처 이후
2021년 국내에 번역 출판된 이 책은 방대하고 치밀한 조사를 바탕으로 쓰였다. 출처 이후

주먹구구식 원전 건설

이 책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빅토르 브류하노프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소장이다. 그는 당을 향한 충성심은 있었지만 원자력에 관해 아는 바는 없었다. 타슈켄트 공과대학에서 그가 전공한 것은 전자공학이었다. 1970년 2월 프리피야트에 도착한 그는 홀로 원전 건설 사업을 꾸려가야 했다. 소련 권력층과 관료들이 수개월의 논의 끝에 정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라는 이름만 있었다. 회계사도 없었고 당국으로부터 받은 예산도 없었다. 체르노빌 근처 프리피야트에서 그는 발전소를 건설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곳에서 일할 직원과 가족이 거주하는 도시도 건설해야 했다. 

소련의 만성적 비밀주의

주먹구구식 원전 개발 과정에 더해 소련의 원자로는 태생적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원전 모델은 감속제와 냉각제 모두에 물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체르노빌 원전의 모태가 된 아톰 미르니 1호는 흑연-물 모델이다. 서구 모델과 달리 물이 증기로 바뀌어도 연쇄 반응이 멈추지 않고 열과 출력이 계속 상승한다. 열과 출력이 폭주하는 걸 막으려면 흑연으로 만든 제어봉을 삽입해야 한다. 제어봉을 제때 삽입하지 못하면 원자로가 폭주하고 노심이 용융하고 원전이 폭발할 수도 있다.

소련의 만성적 비밀주의도 문제였다. 소련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12개 창립 회원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국내 발생 핵사고를 IAEA에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수십 년간 소련의 핵 시설들에서 발생한 수십 건의 사고 가운데 단 한 건도 IAEA에 보고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소련의 원자력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믿어졌다. 예를 들어, 1957년 발생한 키시팀 핵연료 재처리 공장 폭발 사고는 국제 원자력 사고 6등급 규모에 해당했다. 이 폭발로 방사능 오염 노출 지역은 출입 금지 구역이 됐고 오염된 흙은 모조리 땅굴 속에 매장됐다. 그러나 사고는 은폐됐다. 소련 정부는 1989년이 돼서야 폭발 사고를 인정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과 같았다. 최소 20만 명의 사람들이 이 사고로 방사능에 피폭됐다. 출처 뉴욕 타임스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과 같았다. 최소 20만 명의 사람들이 이 사고로 방사능에 피폭됐다. 출처 뉴욕 타임스

돌이킬 수 없는 재앙

설계 결함, 소련 당국의 비밀주의, 폐쇄적 과학자들의 오만은 결국 재앙으로 이어졌다. 체르노빌 원전은 1986년 4월 26일 폭발했다. 폭발한 원자력 발전소의 외관을 묘사하던 저자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시작됐다”고 썼다. 재앙은 원전이 폭발한 뒤에 비로소 시작됐다. 저자는 방사선 피폭은 아무런 감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일백 번을 고쳐 죽을 만큼의 감마선에 노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발생한 피폭자는 최소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원전 엔지니어들과 엔지니어를 꿈꾸던 젊은 직원들, 소방대원들과 방사능 오염 물질 제거 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은 원전 폭발 사고 이후 곧 죽거나 오랜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긴 사고였지만 소련 당국은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했다.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아니라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는 연극에 가까웠다. 거듭되는 은폐와 미흡한 대처는 당국에 대한 소련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경제 침체를 겪고 있던 소련 입장에서 1년 치 국가 예산에 버금가는 수습 비용도 큰 타격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인터뷰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소련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거시사와 미시사를 접목한 역사서

저자는 원자력 과학이나 소련의 정치·경제체제 등 거시적 정보뿐만 아니라, 관련 인물의 생애를 꼼꼼하게 추적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둘러싼 거시사와 미시사를 촘촘하게 엮은 하나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관련자들의 미시사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소련 해체라는 거시사 안에서 서술되며 독자의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저자 애덤 히긴보덤은 역사를 기록하는 저널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줬다. 출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저자 애덤 히긴보덤은 역사를 기록하는 저널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줬다. 출처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큰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이 책을 지루하게 여길 수도 있다. 책의 분량이 740쪽이나 된다. 그러나 이 책은 기록자로서 언론인이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다. 13년간 취재한 내용을 하나의 이야기로 치밀하게 짜냈다. 역사학을 전공했던 히긴보덤 기자는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에 내장된 역사가의 면모를 이 책에서 유감없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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