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문제세미나] ‘흙살림’ 유기농사 체험기

흙 살리는 농업이 농민과 도시민 살린다

20여 년에 걸친 '조용한 혁명' 흙살림 운동은 충북 괴산에서 시작됐다. 1991년 미생물연구회를 시작으로 흙 냄새를 맡은 지 스무 해를 막 넘긴 흙살림. 그들은 친환경 유기농업을 통해 농민과 소비자는 물론이고, 농산물, 흙과 그 속 미생물까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새 세상을 만들었다. 대구농고와 서울농대를 졸업한 뒤 1984년 괴산에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태근(55) 흙살림 대표는 “흙을 살리는 농업이 우리나라 농촌과 농민, 도시민을 살리는 대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대부분 도시에서 나고 자라 농사 체험이 거의 없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들은 지난 11일 괴산시 불정면 삼방리 흙살림 토종연구소를 찾아 ‘조용한 혁명’에 동참했다. 강의실을 벗어나 자연으로 향하는 건 들뜨고 즐거운 일이다.

 

▲ 판화가 이철수 씨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 흙살림 토종연구소 입구. 비닐하우스에서는 토종 모종을 키우고 지렁이를 이용해 분변토를 만드는 실험이 이루어진다. ⓒ 안형준

제천에서 한 시간쯤 달려 그리 높지 않은 고갯마루를 지나자 토종연구소와 직영농장이 펼쳐졌다. 차에서 내린 순간 스쳐가는 건 두엄 냄새. 향긋하지는 않았지만 매연에 찌든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한 구수한 냄새였다. 드디어 유기농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이태근 대표가 뛰어나와 학생들을 토종연구소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우리 국민 한 명이 연간 소비하는 쌀은 약 한 가마입니다. 지금 쌀 한 가마는 15만원 정도 하고요. 그런데 우리가 늘 마시는 커피는 한 잔에 3천원입니다. 한 달에 20잔을 마신다고 치면 1년에 72만원입니다.”

이 대표는 농사체험에 앞서 쌀이 얼마나 푸대접받고 있는지를 얘기하면서 우리 농촌과 농민이 처한 현실, 그리고 흙살림의 역할에 대해 강연했다. 우리는 커피값의 5분의 1 정도를 쌀을 사먹는 데 지출하는 셈이다.

 

▲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학생들이 한국 농업과 흙살림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 안형준

이 대표는 학생들에게 "괴산으로 오는 길에 본 논 색깔이 어떻더냐"고 물었다. 농촌전문기자가 되고 싶어하는 안형준(28)씨가 “누런색”이라고 대답했다. “왜 누런색일까요?” 이 대표의 이어지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그가 말했다.

“많은 도시사람들은 이맘때 논이 원래 누런 줄 압니다. 논은 지금 풀이 나 있어 푸르러야 합니다. 그런데도 논이 누런 것은 제초제를 뿌려 풀을 모조리 죽였기 때문입니다. 화학비료와 농약은 흙 속 미생물과 유기물까지 죽입니다. 흙이 생명력을 잃게 되는 거죠. 그러고선 농사에 필요한 유기물과 미생물을 다시 수입해 사용하는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그는 그런 악순환으로 농사비용이 증가하고 결국 타산이 맞지 않으니 식량자급률이 26%까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화학물질이 농산물에 축적돼 우리 밥상으로 돌아오는 건 더 큰 문제다.

철학이 있어야 버티는 유기농

흙살림은 친환경 농업 연구와 교육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유기농법에 필요한 미생물과 퇴비 등의 자재를 국산화하는 데도 힘을 쏟는다. 이 대표가 괴산에 내려온 1984년 무렵은 유기농법 초창기였다. 그는 “유기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흙 속 미생물인데 당시 토종 미생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신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 21년 째 흙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이태근 대표. ⓒ 안형준

그래서 시작한 것이 미생물연구소다. 이렇게 이어진 흙살림은 이제 유기농산물 생산에서 인증, 유통까지 체계가 잡혀 회원 농가에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9월에는 제17차 세계유기농대회 사전학술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한 농가에서 유기농법을 정착시키려면 적어도 3년은 버텨야 합니다. 농약과 화학비료 때문에 죽어있는 흙의 자생력을 키우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죠. 손도 많이 갑니다. 유기농을 시작해놓고 포기하는 농가가 많은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유기농을 하려면 생산과 유통뿐 아니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는 전체 116만 가구 중 10만 가구 정도다. 나머지는 모두 1970년대 정부가 식량증산을 위해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을 장려한 뒤 그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대표는 “유기농법을 고집하는 농민은 물•공기•흙에 대한 생각, 내 가족뿐 아니라 내 농산물을 먹는 다른 가족까지 배려하는 철학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유기농법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유기농 설비와 관련 자재 등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오히려 미국보다 훌륭해요. 하지만 농민과 소비자들의 의식이 낮습니다.”

우리나라 농민은 유기농을 하면 할 일만 늘어날 뿐 생산량이 ‘관행농업’에 못 미쳐 경제성이 없다고 여긴다. 소비자는 유기농을 비싼 농산물 정도로만 생각한다. 유기농을 통해 자연이 되살아나고 몸에 좋은 먹을거리를 먹게 된다는 인식은 강하지 않다.

“유기농 농산물은 자연 그대로 만들어진 상품이라 모양이 비뚤어질 수도 있고 색이 선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맛, 색깔, 크기 등 모든 것에 만족해야 구매합니다.”

이 대표는 지난 2010년 천호균 쌈지농부 대표와 함께 ‘우리집 생활 꾸러미’ 사업을 시작했다. 유기농 채소나 과일 꾸러미를 월 1•2•4회 가정에 배달한다. 농민과 소비자를 직접 이어줘 정직하게 생산하고 믿고 소비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겠다는 게 이들의 목표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 마을에는 친환경 유기농 가게 ‘농부로부터’를 개장하기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유기농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질문이 이어지자, 이 대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이론보다는 현장체험을 통해 느끼길 바란다”며 직영농장으로 학생들을 안내했다.

지렁이와 진딧벌이 하는 일

토종연구소를 둘러싸고 있는 논과 밭은 약 3.3ha(1만평)로 감자 콩 수수 조 토마토 등 10여 가지 작물이 자라고 있다. 이곳 농산물은 모두 유기농으로 재배된다. 음식물 쓰레기로 만든 퇴비와 지렁이 배설물로 만들어진 분변토 등은 모두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흙의 자생력을 키워주는 친환경 농자재다.
 
“퇴비는 파종하기 최소 일주일 전 흙에 뿌려 섞어줘야 해요. 물론 농지 상태에 따라 양을 달리해야 하고요. 너무 많은 퇴비는 ‘토양비만’을 일으켜 농작물 성장에 방해가 될 수 있어요.”

퇴비가 만들어지는 발효실에 들어간 학생들은 처음 보는 현장이 신기한 듯 질문을 쏟아냈다. 양호근(29)씨는 퇴비를 손으로 한 움큼 쥐고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기도 했다. 볏짚과 닭똥을 이용해 만든 퇴비, 고추씨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와 쌀겨를 섞어 만든 퇴비까지 갖가지 퇴비가 발효되고 있다. 흙살림 이샛별(27) 간사는 퇴비의 용도와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쇠스랑으로 분변토를 파헤치자 수많은 지렁이들이 꿈틀거린다. 

양묘장의 모판에는 갖가지 우리 토종벼들이 자라고 있다. 지금은 다 비슷해 보이지만 자라면서 다른 모양과 색깔 등을 띄게 된다고 한다. 종자에 따라 벼 이삭이 검은색, 누런색, 붉은색을 띄어 우리가 생각하는 황금들판과는 다른 장관을 연출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감자 상추 고추 토마토 브로콜리 등 다양한 작물이 모종 상태로 재배되고 있다.

직영농장에서는 농약을 쓰지 않고 진딧물 같은 병충해를 예방할 수 있는 여러 실험들을 진행하고 있다. 원길식(48) 농장장은 진딧벌을 이용한 ‘천적농법’에 대해 설명했다.

“보리잎은 진딧물이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납니다. 그래서 진딧물이 많이 꼬이는 작물을 재배할 때는 보리 모종에 진딧물을 투입해 키우고 적당한 때 보리 모종을 작물 근처에 둡니다. 그런 뒤 진딧벌을 넣으면 살이 오른 보리 속 진딧물을 잡아먹고 먹이가 떨어지면 재배 작물에 있는 진딧물까지 잡아먹어 농약 없이도 제거할 수 있죠.”

 

▲ 쿠바식 텃밭은 칸막이를 세워 두둑의 흙이 유실되는 것을 막는데,  함께 보존되는 미생물이 흙의 질을 높여준다. ⓒ 안형준

그는 귀촌 후 농사에 실패하고 흙살림을 찾아와 유기농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며 일하고 있다. 그는 쿠바식 유기농 텃밭도 보여주었다. 1m쯤 되는 너비의 긴 텃밭은 굵은 각목으로 둘러쳐져 있는데 쿠바식 유기농의 핵심은 ‘혼작’이다. 파를 상추 브로콜리 양배추 사이에 한 줄씩 심어 파에서 나오는 독한 향이 병충해의 접근을 막도록 한다. 이 방식을 사용하면 도시에서도 유기농 텃밭을 만들 수 있다.

농부의 정성이 묻어나는 밥 한 그릇

견학에 이어 학생들은 직접 브로콜리와 배추가 심어져 있는 밭을 매기로 했다. 두둑 사이 고랑에 한 사람씩 들어가 수북이 자란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제초제를 썼다면 깨끗했을 터이지만 친환경 농법을 쓰는 이곳에서는 모든 잡초를 사람이 직접 뽑는다.

밭고랑은 길어야 50m. 학생들은 처음에 누가 빨리 끝내나 시합하자며 큰소리 쳤지만 농사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쪼그려 앉아 풀을 뽑은 지 얼마 안 돼 종아리가 뭉쳐오는 느낌이 들더니 허벅지와 허리까지 저려왔다. 허리를 펴고 일어서 보면 남은 고랑이 '정글'처럼 느껴졌다.

▲ 한 시간 넘게 풀 매기를 하고 난 뒤 흙살림 직원들(가운데 앞치마 두른 두 아주머니)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양호근
 
제주도에서 감귤 농사를 짓는 부모님 덕에 농사일을 조금 해본 양호근 씨도 “친환경 농사는 인내심인 것 같다”며 힘들어했다. 그러면서 동료들에게는 “이렇게 손이 많이 가지만 참아내지 못하면 금방 또 농약을 쓰게 된다”며 아는 체했다.

학생들과 함께 일하던 이계화(60•직원) 할머니는 스무 살에 괴산으로 시집와 지금껏 농사일을 해왔다. 그는 “여기까지 와서 조금이나마 농민의 마음과 수고를 알아주려는 학생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불과 한두 시간 노동으로 평생 농부로 산 사람들의 심정을 알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공감할 수 있을 듯하다. 토종연구소 2층 벽에 붙어있던 판화가 이철수 씨 작품 ‘당신의 길’이 생각났다.

‘노인 한 분 이랑 긴 콩밭 언덕을 천천히 오르신다. 그 산밭길, 젊어서도 힘들었다.’

▲ 푸짐하게 차려진 유기농 밥상에 학생들이 한껏 들떴다. ⓒ 안형준

견학과 농사체험이 끝나자 잔디밭에는 상추 브로콜리 오이 토마토 등 채소, 유정란으로 만든 계란말이, 아욱국 등으로 차려진 유기농 뷔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남김없이 그릇을 비운 건 유기농 식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된 것인지 노동을 통해 체험했기 때문인 듯하다. 

유기농은 ‘공존’의 가치를 전파한다

농사일과 식사를 마치고 우리나라 토종 종자가 보관된 곳을 찾았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를 잡을 정도로 맛있다고 해서 붙여진 ‘선비잡이콩’, 알맹이가 매우 커서 입에 넣으면 가득 찰 것 같아 이름 붙여진 ‘한아가리콩’ 등 이름 그대로 예부터 내려오는 토종 종자 1천여 종이 보관돼 있었다.

토종 종자 보급에 힘쓰고 있는 이 대표는 “육칠십년대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정부가 토종 대신 신품종을 사용하게 했고 재래종 심는 것을 막았다”며 토종 종자가 많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이태근•천호균 대표가 함께 쓴 책, ‘농부로부터’에 따르면, 김치를 담그는 무 배추 고추의 씨앗조차 절반은 다국적 기업에서 사오는 외래종이거나 신품종이다. 양파 당근 토마토는 더욱 심각해 80% 이상이 그렇다.

“유기농이 우리 농업의 중심이 되고, 유기농의 가치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표는 유기농이 단순한 농법에 그치지 않고 유기농을 통해 우리 사회에 ‘공존’의 가치가 확장됐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산다.


* [농촌문제세미나]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농업·농촌 문제에 대한 기자·PD 지망생들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이번 학기 신설한 강좌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권위있는 학자, 전문농사꾼, 농촌지역 사회활동가, 농업·농촌전문기자와 데스크 교수 등이 참여해서 이론과 농촌현장실습, 취재보도를 하나로 결합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단비뉴스>는 그 강좌 중 일부를 중계해 농업농촌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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