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위 심의 방침 철회 후 심포지엄 개최 등 적극 행보

강풀 등 인기 작가들이 릴레이 1인 시위 등으로 저항했던 웹툰(인터넷만화) 심의 움직임이 ‘업계 자율규제’로 정리되면서 만화계가 구체적인 자율규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 중이다. 작가들은 웹툰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바로 잡고 ‘창작의 자유’와 ‘청소년 보호’를 조화시킬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토론회를 갖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 3월 말, 웹툰 작가들의 1인 릴레이 시위 모습.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주호민, 윤태호, 강풀 작가. ⓒ 이보람
만화 <이끼>의 작가인 윤태호 범만화인비상대책위원장은 7일 <단비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오는 9일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측과 만나 웹툰 자율규제의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방심위는 지난 2월 국내 23개 웹툰에 대해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할 수 있다는 내용의 사전 통지서를 발송했다가 작가들이 크게 반발하자 지난달 9일 만화계의 자율심의에 맡긴다는 내용의 업무협약(MOU)을 한국만화가협회와 체결했다. 이에따라 만화계는 이달 중으로 웹툰작가협회(가칭)를 꾸려 웹툰 자율등급제를 도입하기 위한 작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라고 윤 위원장은 설명했다.

▲ 4월 9일 방심위와 한국만화가협회의 웹툰 자율규제를 위한 MOU 체결 모습. ⓒ 노컷툰 공식블로그
“웹툰 자율규제의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는 반갑습니다. 하지만 만화규제의 근거인 청소년보호법이 있는 이상, 이번과 같은 상황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화계가 꾸리는 자율등급제팀이 적합한 조직이 아니라고 방심위가 판단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모르는 일이죠. 그래서 방심위 관계자들과 만나 의견을 들어볼 예정입니다.” 

폭력을 만화 탓으로 돌리면 ‘구조적 원인’에 면죄부 주는 꼴

지난달 27일에는 사단법인 우리만화연대 주최로 ‘청소년 보호를 위한 웹툰 자율규제와 표현의 자유‘ 심포지엄이 열려 50여명의 만화가와 학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은 한국 만화규제의 역사를 짚어보고, 향후 웹툰 자율규제의 방향을 제안했다.

▲ 심포지엄에 참가한 만화계와 학계 인사들의 발제 모습. ⓒ 엄지원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하종원 교수는 ‘미디어와 폭력의 상관관계’를 주제로 한 발제에서 “폭력성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모호하고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지적한 뒤, “대중들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미디어의 폭력성을 인지하기보다 일부 언론들의 보도를 보고 무비판적으로 ‘폭력은 만화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의 웹툰 심의 파동을 촉발한 것으로 지목된 조선일보의 <열혈초등학교> 보도가 대표적인 예라고 하 교수는 설명했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김창남 교수는 “크든 작든 만화 등 미디어에 폭력성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대중은 미디어 환경에만 갇혀 사는 존재가 아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대중은 각자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건들 속에 살기 때문에, 폭력의 원인을 미디어에만 돌리는 것은 결국 미디어 바깥의 수많은 문제들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폭력의 문제를 좀 더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로 바라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특히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한 것처럼 국가 제도에 의한 구조적 폭력이 가시적 폭력(폭행 등)이나 상징적 폭력(욕설 등)보다 더 위험하다고 지적하고, 미국의 예를 들어 보수적 정권 하에서 구조적 폭력이 더 두드러진다고 강조했다.

국내 만화 규제의 역사 뿌리 깊어

청강대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1967년 민생질서의 파괴 등을 이유로 만화를 도박, 밀수, 탈세 등과 함께 6대 사회악으로 선정했다”며 국내 만화규제의 역사가 뿌리 깊다고 설명했다. 1971년에는 ‘만화가 어린이들의 건전한 정서발달을 해친다’며 순정만화와 탐정물, 과학만화까지 포함한 2만 5천권을 폐기처분하거나 불태운 일도 있었다. 1980년대 말에는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만화에 대한 규제 강도도 낮아졌지만 1997년 ‘일진회 사건’ 등을 계기로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심의에 걸린 만화를 수거·파기·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만들어졌다.

앞으로의 자율규제 방향과 관련, 국민대 법학과 황승흠 교수는 “웹툰과 만화 심의를 일원화 하고 관리 주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현재 출판만화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웹툰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청소년보호위원회의 규제를 받는다. 황 교수는 웹툰도 ‘만화 콘텐츠’인데 ‘인터넷망을 이용하는 정보’로 분류돼 다른 관할기구의 심의를 받는 것은 기형적 상황이라며 웹툰을 ‘정보’가 아닌 만화 출판물로 분류해 간행물윤리위가 다루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강대 만화창작과 김소원 강사는 “일본의 경우 만화의 산업적 경쟁력이 커지면서 출판업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만화업계를 보호하고 자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만화규제의 위기를 넘겼다”며 “우리도 만화 콘텐츠를 활용하는 포털과 출판업계가 심의 문제에 있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박인하 교수는 방심위가 최근 만화 심의에 대한 자세를 전향적으로 바꾼 배경에 대해 “이전까지 ‘만화의 독자는 어린이’라는 전제를 깔고 봤다가 웹툰의 주요 독자가 최근 정치, 사회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2030세대’라는 것을 깨닫고 부담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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