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실험실] 우크라이나인이 말하는 피난 생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벌써 여섯 달이 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영토의 22%가 러시아에 점령됐고, 수많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인 지난 8월 24일, 민간인이 살고 있는 동부 지역에 로켓 폭격을 가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남부 헤르손주의 탈환 작전을 실시하면서 8년 전 러시아에게 빼앗긴 크름반도를 되찾겠다고 공언했죠.

그런데 우리가 매일 이렇게 접하는 전쟁 소식은 현재 상황을 전달해줄 뿐,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어떻게 폭격이 이뤄진 도시에서 살아남았는지,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지 알려주지는 못합니다.

외신 보도 번역에 거의 의존하고 있는 국내 언론 특성상 더 어렵죠.

그래서 단비뉴스는 현지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과 접촉해 그들이 직접 보고 겪은 전쟁을 국내에 알리기로 했습니다.

지난 3월부터 단비뉴스가 만난 7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 가운데 1명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지난 4월 러시아에 함락된 마리우폴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기억하시나요?

안나 자이체바는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살아나온 사람입니다.

스물네 살의 안나는 고등학교 프랑스어 강사이자 태어난 지 몇 달이 되지 않은 아이의 엄마입니다.

무려 65일 동안 마리우폴에 있는 아조우스탈 제철소 지하 벙커에서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마리우폴은 친러시아 성향의 돈바스 지역과 2014년 러시아에 병합된 크름반도를 잇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전략적 요충지라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의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러시아는 산부인과, 어린이 병원, 시민들이 대피한 극장까지 파괴했죠.

장소를 가리지 않는 러시아의 공격에 안나는 아조우스탈 제철소로 몸을 피했습니다.

마침 남편이 제철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나흘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던 안나는 며칠 분의 분유, 기저귀 몇 장, 비상식량만을 챙겨서 나왔습니다.

이때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틀째인 2월 25일입니다.

하지만 전쟁은 기약 없이 길어졌습니다.

안나가 살던 아파트도 폭격으로 불에 탔죠.

벙커 내부에 마련돼 있던 물과 비상식량이 점점 떨어져 갔습니다.

지하 벙커에는 안나처럼 몸을 숨긴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있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하루 한 끼만 먹거나 파스타 생면을 맹물에 불려 먹어야 했는데, 성인도 먹기 힘든 음식을 아이들이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지하 벙커에서 카페와 식당 놀이를 하며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상상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인들 사이에서 의견 갈등도 많아졌습니다.

어린이, 부상자, 기저질환자, 노약자 등의 순서로 비상식량을 가져가기로 했는데 몇 살을 노인으로 할 건지, 얼마나 아픈 사람을 약자로 정할지에 대해 자주 싸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몸을 피하고 있는 발전소가 폭격으로 작동을 멈추면서 전기도 물도 쓸 수 없었습니다.

갓난아기가 있는 안나는 아기에게 줄 우유와 물을 촛불로 데워야 했습니다.

씻는 것도 불가능해 3~4월부터는 빗물을 받아 손이나 오염된 부분을 조금씩 닦아내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지낸 생활이 65일.

지하 5~6층 깊이의 어둡고 습한 지하 벙커에서 수백 명의 사람과 지내는 생활은 정말 곤욕이었습니다.

안나는 이때 “깊은 바다 밑 잠수함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고 표현했죠.

지난 4월 30일 구조돼 지금은 아기와 함께 안전한 곳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결혼한 지 1년 된 남편이 우크라이나 군 아조우 연대에 입대해 있다가 현재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기 때문이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포로 맞교환을 논의 중이지만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난 7월 18일 친러 성향의 방송 뉴스에서 남편의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인 상황.

남편은 제철소에서 헤어지면서, 전쟁이 끝나면 안나와 아기를 위해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말했지만, 안나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남편의 생사를 파악할 때까지 계속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안나, 그리고 안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을 수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 이전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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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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