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인터뷰] 하상윤 세계일보 사진기자 ①

사진으로 진실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 사진기자, 다른 말로 ‘포토 저널리스트’(Photo Journalist)다. 사진기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뉴스를 전할까. <단비뉴스>는 지난 7월 28일 낮, 서울시 구파발역 근처 한 카페에서 하상윤 <세계일보> 사진기자와 만났다. 그는 8년 차 사진기자다. 세명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 8기 졸업생이기도 하다. 든든한 풍채의 그는 밝은 미소를 띠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사진기자가 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사진기자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를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균도는 잘 지내?”, “비자림로는 어떻게 됐어?” 그를 만난 지인들이 건네는 안부 인사다. 고리원자력발전소 근처에서 발달 장애를 안고 태어난 ‘균도’는 그의 첫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의 주인공이다. ‘비자림로’는 그가 제주 비자림로 4차선 확장 공사를 계기로 4년에 걸쳐 카메라를 들고 밀착취재한 현장이다. 그와 알고 지낸 사람들은 그의 사진이 누구를, 또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다.

2018년 11월 7일, 북측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열린 남북 보건의료협력 분과회담에 풀기자로 참석했을 당시 하 기자의 모습이다. 현재 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은 폭파돼 사라진 상태다. 하상윤 제공
2018년 11월 7일, 북측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열린 남북 보건의료협력 분과회담에 풀기자로 참석했을 당시 하 기자의 모습이다. 현재 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은 폭파돼 사라진 상태다. 하상윤 제공

스토리텔링에 적합한 시각언어, 사진

그는 경북 김천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의 자신은 “‘리틀 파브르’였다”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그의 곁에는 항상 흙, 물, 풀, 나무, 곤충이 있었다. 개미가 수고하며 집 짓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어린 시절의 일상이었다. 평소 자연환경에 관심을 두고 살아온 그는 대학에서도 환경생태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시절 어느 교수가 던진 말이 그를 사진에 눈뜨게 했다.

대학교 3학년이던 2009년, 그는 고려인 동포를 만나는 문화교류 봉사로 러시아 남부에 있는 아디게아 공화국(Republic of Adygeya)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봉사단을 인솔한 교수가 그의 사진을 보고 “너는 (보는) 눈이 다르다”고 칭찬했다. 교수는 현미경 전문 사진가이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준다는 것을 처음 절감한, 가뭄에 단비 같은 경험이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대학 캠퍼스 사진 공모전에 출품했다. 그의 사진이 대상(大賞)에 선정돼 학교 달력에 실렸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소름 돋는 일”이었다. 이후 학교 홍보팀에서 ‘학생 사진기자’ 자격으로 사진을 찍었다. 어느 곳이건 누구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 좋았다. 그의 손에는 늘 카메라가 있었다.

뒤늦게 만난 사진으로 인해, 그는 진로를 고민하게 됐다. 대학 시절, 그는 주전공인 환경생태공학 외에도 뇌인지과학, 신경과학, 심리학 등을 공부했다. 2012년 한 해 동안 의학전문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로 공부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그의 옆에는 항상 카메라와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진짜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카메라를 들고 다시 새로운 길 위에 섰다.

하상윤 세계일보 사진기자가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하상윤 세계일보 사진기자가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사진기자가 되기로 결심한 뒤, 언론인 지망생을 위한 다음카페 ‘아랑’을 둘러보았다. <미주 한국일보>에서 사진부 인턴기자를 채용한다는 공지를 봤다. 대학 졸업 전이었지만, 낯선 땅에서 사진과 저널리즘이 접목되는 사진기자의 일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서류와 전화 인터뷰를 거쳐 2013년부터 1년 동안 <미주 한국일보> 인턴기자로 활동했다. 주로 한인 커뮤니티 또는 이민 사회의 현장을 기록했다. 보도 사진에 대한 기초를 닦았다. 사진의 언어적 요소, 이야기를 전달하는 힘 등을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에게 사진이 매력적이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사진은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시각 언어’였다. 그 언어가 그에겐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언어였다.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던 대학원 시절

인턴기자의 경험은 저널리즘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추겼다. 저널리스트의 시각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2015년 1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오랫동안 현직에서 활동한 교수들로부터 많이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숙사와 학교를 오가는 생활을 통해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세상의 이야기를 자신의 프레임에 담아 전달하는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었다. 나이 서른에 그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에 입학했다.

“입학 초기는 막연함의 연속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여 어떻게 취재할 것인지 막연했다. 그에게 대학원 생활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키우기 위한 분투의 시간이었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취재와 보도에 옮겨 담는 길을 1년에 걸쳐 배웠다.

첫 여름방학 직후인 2015년 9월, 그는 ‘내가 본 모든 것은 사랑이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단비뉴스>에 실었다. ‘균도 부자(父子)’ 이야기를 다룬 그의 첫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이었다. 사진에 담은 아버지 이진섭(당시 나이 51) 씨와 아들 이균도(당시 나이 24) 씨는 이미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부산 기장군의 고리원자력발전소 근처에 살았던 아들 이균도 씨에겐 발달장애가 있었다. 이 씨 부자는 장애아동복지지원법과 발달장애인지원법의 개정을 요구하며 3천 킬로미터 (km) 넘는 길을 걸었다.

길 위에서 처음 만난 아버지 이 씨는 하 기자를 차갑게 대했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 보도를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 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하 기자의 어머니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어머니는 연탄가스 화재로 왼쪽 발목을 잃었다. 절룩이는 엄마와 함께 동네를 걸었던 기억을 간직한 하 기자에게는 타인의 시선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더듬이가 있었다.

사연을 들은 이 씨 부자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 기자는 그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함께 먹고, 자고, 씻었다. 셋은 한 가족이 되어 걸었다. 길 위에서 발달 장애인의 인권을 외치는 부자의 모습, 하루에도 수없이 입 맞추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하 기자는 사진에 담았다. 그 무렵 참가했던 부산의 어느 포토 워크숍에 그 사진들을 출품했다. 최우수 포트폴리오 상을 받았다.

이진섭 씨 부자가 고리원자력발전소 인근 방파제에서 입 맞추고 있다. 그들 너머로 원자력 발전소의 모습이 보인다. 하상윤 제공
이진섭 씨 부자가 고리원자력발전소 인근 방파제에서 입 맞추고 있다. 그들 너머로 원자력 발전소의 모습이 보인다. 하상윤 제공
아버지 이진섭 씨와 아들 이균도 씨가 얼굴을 마주 보고 잠자리에 누워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종일 함께 있었다. 하상윤 제공
아버지 이진섭 씨와 아들 이균도 씨가 얼굴을 마주 보고 잠자리에 누워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종일 함께 있었다. 하상윤 제공

그가 찍은 이 씨 부자의 사진을 보면, 놀라운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씨 부자는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스며든 하 기자는 숨 쉬듯이 셔터를 눌렀다. <세계일보> 필기시험 전날에도 하 기자는 균도 부자와 함께 서울 작은 여관방에서 잤다. 필기시험이 끝난 뒤에는 창덕궁 앞에서 만나 셋이 함께 밥을 먹었다.

이 씨 부자를 기록한 사진은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계속 알려졌다. 국내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제정한 ‘온빛 사진상’에 ‘우리 균도’라는 제목으로 출품하여 수상했다. 2016년 1월에는 사진 전문 갤러리 류가헌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그리고 하 기자는 <세계일보> 공채에 최종 합격했다. 아버지 이 씨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진섭 씨는 하 기자에게 농을 섞어 축하했다. “니, 내 땜에 된 거 아이가?”

충북 보은에 있는 남다리 대장간 설용술 장인이 도끼날을 벼리고 있다. 불똥이 얼굴로 튀었지만, 그는 줄곧 도끼를 응시한다. 하상윤 제공
충북 보은에 있는 남다리 대장간 설용술 장인이 도끼날을 벼리고 있다. 불똥이 얼굴로 튀었지만, 그는 줄곧 도끼를 응시한다. 하상윤 제공

<단비뉴스> 시절, 하 기자가 분투했던 또 다른 성취가 있다. 2015년 10월, 그는 ‘손, 녹슨 쇠메 소리를 기억해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현재 <단비뉴스> 지역사회부의 전신인 ‘지역농촌팀’에서 활동했던 그는 지역성과 농촌문제의 접점에서 대장간을 발견했다. 농기계가 등장하기 전부터 농기구를 제작했던 대장간, 그리고 농기구를 직접 만드는 야장(冶匠)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농촌 소멸과 궤를 같이한다고 보았다.

처음 기획안을 들고 당시 장해랑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2022년 퇴임)를 찾아갔을 때 돌아온 피드백은 “전혀 새롭지 않다, 고리타분하다, 수십 번 나왔던 이야기다”라는 쓴소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증명해보자’라는 각오로 임했다. 학교에서 새벽까지 기획안을 수정하던 날, 장해랑 교수가 그에게 미소 지으며 지나갔다. 그의 눈빛에서 ‘너 아직 하고 있네? 나도 보고 있어’라고 응원하는 인상을 받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베테랑 저널리스트’인 스승의 응원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하 기자가 2015년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1학년 재학 중에 찍은 남다리 대장간 설용술 장인의 손이다. 하상윤 제공
하 기자가 2015년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1학년 재학 중에 찍은 남다리 대장간 설용술 장인의 손이다. 하상윤 제공

기획안 수정을 거듭한 그는 ‘손’에 접근했다. 그는 무형의 존재가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가 남다리 대장간에서 만난 설용술(당시 나이 83) 장인은 두 차례 중풍을 겪으며 대뇌 중추를 상실해 말을 잃었다. 귀가 어두운 장인이 철을 쳐낼 때마다 그의 손에서 호미와 낫이 나오는 게 하 기자의 눈에는 신기했다. 장인은 시끄러운 대장간에서 오로지 손의 감각으로 농기구를 만들고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장인의 손에 새겨진 것을 보여줘야겠다고 하 기자는 생각했다.

그는 4차례에 걸쳐 충북 보은에 있는 장인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그의 모습을 지긋이 관찰했다. 이후에는 그의 모습을 명과 암을 강조하는 흑백사진으로 기록했다. 장인은 그를 손자처럼 대해줬고, 그는 장인의 손과 일하는 모습을 담았다. 장인의 일상을 따라다니며 함께 보리밥과 떡을 먹었던 시간은 지금도 그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2015년 대학원에 입학해 막막했던 봄을 보내고, 여름 내내 취재에 매달렸다가, 가을 동안 잇따라 굵직한 역작(力作)을 내놓은 그는 그해 겨울이 시작되던 12월, <세계일보> 사진기자 공채에 합격했다. 2015년 12월 1일이 첫 출근일이었다.

입사 이후 두 달 동안, 그는 ‘경찰팀’에 배치되어 경찰서 등을 돌면서 각종 사건사고를 취재하는 수습기자 시절을 보냈다. 시각언어를 사용하는 일이 없는 경찰팀 생활이 쉽지 않았다. 2016년 3월, 정식으로 사진부에 배치됐다. 손에 쥐어진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나가는 일이 시작됐다. 그는 비로소 즐거웠다.

실수가 용납되던 대학원 시절과 달리,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다. 그가 찍은 사진이 지면에 인쇄됐다. 두려웠다. 또한 뿌듯했다. 사진을 지면에 전시하는 기분이었다.

어두운 곳을 빛으로 기록하기

당시 <세계일보> 사진부는 격주로 기획 사진 보도물을 내놓았다. 이를 담당한 기자는 10주 동안 밀도있는 취재를 해볼 수 있었다. 입사 뒤 넉 달여가 지난 2016년 4월, 그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의 첫 기획은 지하철 기관사를 비추는 일이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의 황성호 기관사가 지하철을 운행하고 있다. 노출시간 0.8초, 지하터널이 한 점으로 모여 보인다. 모든 게 점 하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하상윤 제공
서울도시철도공사의 황성호 기관사가 지하철을 운행하고 있다. 노출시간 0.8초, 지하터널이 한 점으로 모여 보인다. 모든 게 점 하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하상윤 제공
황상호 기관사가 폐쇄회로(CCTV)를 통해 승객의 탑승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전동차 문을 여닫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하상윤 제공
황상호 기관사가 폐쇄회로(CCTV)를 통해 승객의 탑승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전동차 문을 여닫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하상윤 제공

2016년 5월11일 <세계일보> 지면에 그의 취재 결과가 실렸다. ‘터널의 어둠 가르며…오늘도 '시민의 발'은 달린다’ 기사에서 그는 기관사의 하루를 기록했다. 그가 만난 황상호(당시 나이 50) 기관사는 세 뼘 남짓한 기관실에서 햇볕 드는 구간이 전혀 없는 5호선 지하철을 운전했다. 그는 공기 순환이 안 되는 어두운 지하에서 승객의 안전 상태를 세심히 살피며 지하터널을 통과했다. 매우 고된 노동이었다.

“사진이라는 시각언어를 다루는 기자로서 승객들, 그리고 그들이 보지 못하는 기관사 사이의 매개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그는 당시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그의 기사는 네이버 메인 화면에 소개됐다. 기관사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이후에도 그는 카메라를 잠시 뒤로 물리고 세상을 보았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의 세상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 세상에 스며든 뒤에야 하 기자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언어로 세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 2회에서는 하상윤 기자가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서 포토저널리즘을 성취하기 위해 걸어온 길을 소개한다.

[단비 인터뷰] 하상윤 <세계일보> 사진기자 ② 오래 보고 다르게 보고, 깊게 보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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