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⑨ 마리아가 전하는 부차 민간인 학살

지난 4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Kyiv) 인근 도시 부차(Bucha)에서 러시아군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서른세 살의 마리아 티모셴코(Mariia Tymoshenko) 씨의 삼촌도 희생자가 됐다. 마리아 씨의 삼촌, 올렉산드르 크리벤코(Oleksandr Kryvenko) 씨는 사망한 지 2주 만에 가족에 의해 발견됐다. 그의 어깨에는 러시아군 총알 두 발이 박혀 있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정부는 부차 지역에서 발견된 시신 458구에 대한 조사를 완료했다. 조사 결과 시신 419구에서 고문과 폭행, 총살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8일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잠시 러시아에 점령당했다가 다시 우크라이나가 회복한 부차에서는 이들의 장례식이 이어지고 있다.

<단비뉴스>는 지난 6월 30일부터 대면, 전화, 문자로 마리아 씨를 인터뷰해 한국에 입국하기 전 우크라이나에서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현장, 그리고 전쟁 범죄의 희생자가 된 삼촌의 이야기를 들었다.

옆집 마당서 시신으로 발견된 삼촌

마리아 씨는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이르핀(Irpin)에서 태어나 부차에서 자랐다. 2008년 고려인 2세 아나톨리 김(Anatolii Kim) 씨와 결혼한 후에도 부차에서 신혼을 꾸렸다. 남편과 함께 땀 흘려 작은 1층짜리 단독주택을 직접 짓고 페인트칠도 했다. 그곳에서 아들 이고르 김(Igor Kim)도 낳았다.

형편이 넉넉지 않던 탓에 남편 아나톨리 씨는 한국으로 와 돈을 벌기로 했다. 충남 천안시 직산에 있는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지난 2년간 일하고 있다. 전쟁 발발 후 아나톨리 씨는 부인과 아들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신속히 비자 업무를 처리했다. 마리아 씨는 4월 9일, 아들과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마리아 씨는 한국 도착 나흘 만인 4월 13일, 고향인 부차에 사는 이모로부터 삼촌이 러시아군에 의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모가 전해 준 삼촌의 죽음은 참혹하고 허망했다.

6월 30일 충남 천안 직산의 한 카페에서 마리아 씨와 아들 이고르 군이 단비뉴스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윤준호 기자
6월 30일 충남 천안 직산의 한 카페에서 마리아 씨와 아들 이고르 군이 단비뉴스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윤준호 기자

성실했던 75년의 삶, 마지막 생일

3월 27일 저녁, 마리아 씨의 삼촌 올렉산드르 씨의 행적이 묘연해졌다. 그의 부인과 아들이 집에 왔을 때, 부엌의 도마에는 미처 썰지 않은 양파가 놓여있었다. 올렉산드르 씨가 요리를 하던 중 잠시 밖으로 나간 것이라고 유족들은 추정한다.

그의 행방은 2주 뒤에야 확인됐다. 올렉산드르 씨는 이웃집 앞마당에서 발견됐다. 바닥을 향해 엎드린 채 숨져있었다. 가슴 쪽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시신은 부패 돼 있었다. 이모는 45살 된 아들과 함께 남편의 시신을 수습했다.

생전의 올렉산드르 씨(왼쪽)는 성실하고 웃음이 많았으며 가족과 자주 나들이를 갔다.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생전의 올렉산드르 씨(왼쪽)는 성실하고 웃음이 많았으며 가족과 자주 나들이를 갔다.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삼촌 올렉산드르 씨는 1947년 부차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연방에 속해 있던 20대 시절에는 소련 공군에서 항공기 개발자로 일했다.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후에는 40년 동안 부차의 한 공립학교에서 목공예 지도 교사로 일했다.

퇴직 후에는 농사를 지었다. 감자를 비롯한 채소를 주로 재배했다. 작은 닭 농장도 관리했다. 쉬는 날 없이 성실하게 일했고, 가족 행사도 놓치지 않았다. 75세의 나이에도 항상 활동적이고 웃음이 많고 고향을 사랑했다고 마리아 씨는 삼촌을 회고했다.

전쟁 발발 직후, 마리아 씨는 아들과 함께 폴란드로 피신했다. 삼촌에게도 함께 가자고 설득했다. 올렉산드르 씨는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밭을 가꾸고,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고, 집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렇게 마리아 씨는 삼촌과 이별했다. 그보다 앞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9일, 삼촌은 자신의 생일잔치를 벌였다. 그것이 마지막 생일이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생일날 활짝 웃던 삼촌을 마리아 씨는 기억한다.

“가족이 모두 모여 그의 생일을 축하했어요. 늘 그랬듯 그는 농담을 많이 했고 웃음이 많았어요. 자신의 아내와 딸, 조카들이 얼마나 예쁜지 자주 이야기했어요. 그가 그렇게 허무하게 삶을 끝낸 것이 너무나도 슬퍼요.”

마리아 씨는 서울에서 열리는 반전 집회에서 쓰려고 죽은 삼촌의 사진을 담은 포스터를 직접 만들었다.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마리아 씨는 서울에서 열리는 반전 집회에서 쓰려고 죽은 삼촌의 사진을 담은 포스터를 직접 만들었다.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죽음으로 물든 고향

전쟁 중 민간인이나 민간인 주요 활동 기반 시설을 고의로 공격하는 것은 국제법에 따라 전쟁 범죄로 규정된다.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은 부차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는 전쟁 초부터 돈바스 지역의 기차역, 마리우폴의 극장과 학교, 병원, 오데사의 국제공항 등 민간인 시설을 폭격했다. 지금까지 공식 집계된 민간인 사망자만 5000명이 넘는다.

“수도 키이우를 점령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부차를 걸림돌로 여겨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적 공격을 가한 것 같아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저항으로 쉽게 부차와 이르핀을 통과하지 못하자 극단적인 전략을 택한 거지요.”

마리아 씨가 살았던 부차의 어느 공원.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마리아 씨가 살았던 부차의 어느 공원.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마리아 씨가 부차를 빠져나오며 목격한 아파트들의 모습.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마리아 씨가 부차를 빠져나오며 목격한 아파트들의 모습.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공포 영화 같았던 피난 기차

마리아 씨는 학살이 발생하기 직전에 부차를 빠져나왔지만, 피난길도 지옥 같았다. 키이우 기차역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역무원에게 기차표를 내밀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인파 가운데서 마리아 씨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아들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미처 기차에 타지 못한 사람들은 주먹과 발로 열차를 두들겼다.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쳤다. 그들을 뿌리치고 기차가 출발했다. 기차 안은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4명을 수용할 수 있는 캐빈 한 칸에 10명씩 들어갔기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불쾌한 냄새가 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래도 사람들은 노약자, 여성,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키이우에서 르비우(Lviv)로 향하는 기차 안 통로에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이 쭈그려 앉아있다.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키이우에서 르비우(Lviv)로 향하는 기차 안 통로에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이 쭈그려 앉아있다. 마리아 티모셴코 씨 제공

반전 노래 부르는 마리아, 회복하는 유족

마리아 씨는 키이우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7년간 일했다. 올해 2월에는 심리학을 다시 공부해 졸업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변호사이자 심리상담사였던 마리아 씨는 한국에 와서도 그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전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온라인으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자신의 마음까지 치유하진 못했다. 13살 된 아들 이고르는 한국어도 영어도 하지 못한다. 한국의 학교에 다니기도 곤란한 상황이다. 전쟁이 어서 끝나야 마리아 씨와 그 아들의 평범한 일상이 회복될 수 있다. 그날을 기다리며, 마리아 씨는 2주에 한 번씩 서울에서 열리는 반전 집회에 참여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집회에서 그는 삼촌을 추모하고, 노래를 부른다. 그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은 ‘Say No to War’이다. 노래 가사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는 이길 것이다.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된다.”

삼촌 올렉산드르 씨의 유가족은 부차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마리아 씨는 이모 스비우트라나 트카추크(Svitlana Tkachuk) 씨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모는 더 이상 삼촌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성실했던 남편의 삶을 따르겠다는 마음으로 일상에 더 열중하고 있다. 스비우트라나 씨는 지붕을 직접 고치고 창문을 새것으로 갈았다. 고장 난 자동차도 직접 손봤다. 떠난 이가 사랑했던 집과 고향을 원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살아남은 이들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마리아 씨는 말했다.

6월 26일, 서울 시청역 광장에서 열린 반전 집회에서 마리아 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윤준호 기자
6월 26일, 서울 시청역 광장에서 열린 반전 집회에서 마리아 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윤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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