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이 1975년 발표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2010년 한국에서 읽어도 거리감이 별로 없다. 언론의 편향 보도, 가십 위주 보도가 어떻게 한 개인을 파멸시키는지 보여주는 이 소설은, 미네르바 사건과 PD수첩 사건을 보도한 우리 언론을 떠올리게 한다.

한때 인터넷 상에서 ‘경제대통령’으로 불렸던 미네르바는 ‘전문대 졸업생인 백수’로 알려지면서 진위 논란을 낳았고, PD수첩 제작진의 개인 전자우편은 유력지 1면에 실려 사생활 침해와 검열 논란이 일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표지

이 소설은 평범한 27세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한 일간지 기자를 살해하게 된 배경을 줄거리로 한다. 블룸은 카니발 기간에 벌어진 파티에서 은행강도에 살인혐의까지 있는 괴텐을 사랑하게 되어 하룻밤을 보낸다. 그녀는 이 일로 경찰에 소환된다. 일간지 <차이퉁>은 조사과정을 필요 이상으로 공개해 블룸을 괴텐과 공범인 것처럼 몰아간다.

또 그녀의 지인을 인터뷰해 그녀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든다. 조서의 토씨 하나도 다시 점검하고 서명하는 꼼꼼한 성격의 카타리나 블룸은 <차이퉁>에 등장한 자신의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인터뷰 내용을 점검한 뒤 그것이 사실과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고, 결국 <차이퉁>기자를 살해한다.

어머니조차 딸을 범인으로 생각한다고?

뵐은 살인 사건의 전말을 알리기 위해서 블룸이 경찰 수사를 받는 날부터 5일 간 그녀의 행적을 재구성하여 보고한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직접 등장하여 사건의 이해를 돕는 논평을 한다. 그 덕분에 독자는 블룸이 왜 <차이퉁>기자에게 반감을 갖게 되었는가에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소설을 읽어 내려가게 된다.

<차이퉁>의 왜곡보도는 도가 지나쳤다. 블룸과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보도사례에서 왜곡은 절정에 이른다. 블룸의 어머니가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한 것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라고 바꿔 보도한다.

블룸의 어머니는 건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기자는 의사의 만류를 뚫고 병원직원으로 변장해 몰래 잠입한 뒤 딸의 혐의 사실을 알리고 인터뷰를 강행한다. 놀란 어머니가 충격으로 사망하자 오히려 블룸을 ‘어머니를 사망하게 한 불효녀’라고 매도한다.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분노한 블룸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장례식에서 눈물을 꾹 참자, <차이퉁>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않는 냉혈녀’라고 보도한다.

‘색깔’ 공격에 동원되는 것들

<차이퉁>은 블룸이 ‘빨갱이’라는 색깔공격도 빼놓지 않는다. 그 근거로는 블룸이 일하는 집 주인인 블로르나 변호사의 부인이 진보성향이라는 것과, 블룸의 아버지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든다. 이는 블룸의 성향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지 못 할뿐더러, 설사 블룸이 사회주의자라 하더라도 괴텐을 숨겨주고 도망치게 한 혐의와는 무관한 인신공격일 따름이다.

언론에 대한 작가의 시각은 당대 현실과 관련이 있다. 68혁명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의 독일 한 소도시에서 은행강도 사건이 일어나 시민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한다. 통속적인 일간지 <빌트>는 별도의 확인절차와 증거도 없이 이 사건을 68혁명 당시 도시게릴라였던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바더 마인호프 그룹, 살인 행각을 계속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뵐은 <빌트>지의 보도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슈피겔>지에 쓰지만 대중들은 오히려 ‘뵐이 테러조직을 옹호한다’며 분노한다. 이 사건은 <잃어버린 명예>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저널리즘에 대한 이 소설의 묘사는 현실의 여러 장면들과 겹친다. 뵐은 이 책의 서두에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와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라고 썼다. ‘불가피하다’라니, 작가가 저널리즘을 생각할 때 <빌트>의 보도행태를 짚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빌트>의 흥미위주 가십보도가 <빌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일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든 언론인지망자로서 이 책을 읽고나면, ‘입체적 취재를 통한 정확한 사실 보도’나 ‘특정 이념에 치우쳐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 언론인의 양심’과 같은 언론인이 지켜야 할 표준들이 떠오른다.

전혜린을 유혹한 뵐의 ‘책 제목 뽑기’

그러나 이 소설이 ‘사실 보도’나 ‘언론인의 양심’을 강조하는 방식은 도덕적이거나 당위적이지 않다. 소설 제목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인데, 기다란 부제가 달려있다;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저자 하인리히 뵐

뵐은 자기 소설에 길면서도 여운 있는 제목을 다는 데 재주가 있는 작가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차는 정시에 도착하였다>…. 하나 같이 명 카피라이터가 뽑은 듯한 제목이 독자를 유혹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저작권이 엄격하게 보호받지 못하던 한국에서 전혜린의 책 제목으로도 사용돼 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길고 인상적인 제목이 취재원의 시점에서 나왔다면, 부제는 기자의 시점에서 가슴에 새겨둘 만하다. 하나의 기사가 멀쩡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 수도, 원수로 만들 수도 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그러나 기사의 영향력만큼이나 그것이 잘못됐을 때 발생하는 ‘폭력성’ 또한 가공할 위력을 지닌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카타리나 블룸을 ‘살인범의 정부’, ‘음탕한 공산주의자’로 만든 소설 속의 기자는 살해당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왜곡 보도를 일삼고 멀쩡한 개인에게 색깔을 덧씌우는 ‘짝퉁기자’들이 지금도 활개를 치지만, 양심의 가책조차 받지 않는 듯하다. 보도의 피해자가 구제받기 힘든 토양에서 ‘블룸의 증오들’이 마구 증식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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