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⑧ 우크라이나 난민촌 다녀온 안드레이 교사

안드레이 리트비노프(Andrei Litvinov, 38) 씨는 재한 우크라이나인이다. 2010년 한국에 들어와 생활하다가 한국인 아내와 결혼했다. 지금은 다섯 아이의 아빠다. 안드레이 씨는 2015년부터 광주에 있는 새날학교의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새날학교는 광주 고려인 마을 자녀와 북한 이탈주민 자녀 등의 한국 사회 정착을 위해 설립된 대안학교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한 뒤, 그는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심했다. 전쟁에 쫓긴 동포들을 돌보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안드레이 씨는 지난달 5월 17일부터 이달 8일까지 23일 동안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촌에서 봉사했다. <단비뉴스>는 안드레이 씨가 폴란드에 있던 지난달 25일 줌(ZOOM) 화상 회의 서비스를 통해 그와 한 차례 인터뷰했다. 그가 귀국한 이후인 지난 17일에는 광주광역시의 어느 교회에서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안드레이 씨는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있는 폴란드의 도시 프셰미실과 수도 바르샤바를 오가며 여러 난민을 만난 이야기를 <단비뉴스>에 들려줬다. 

우크라이나 난민과 함께한 23일

안드레이 씨에게는 우크라이나에 남은 두 명의 가족이 있다. 40세인 형과 67세인 아버지다. 형은 드론을 관리하는 현역 군인으로 복무중이고, 아버지는 시민군으로 활동하던 중 폭격으로 오른팔을 다쳐 치료받다가 얼마 전 퇴원했다. 안드레이 씨는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가족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남아 있는 자신도 우크라이나를 위한 일을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심은 안드레이 씨를 폴란드에 있는 난민촌으로 이끌었다.

지난 17일,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씨가 와 인터뷰하고 있다. ⓒ 유제니
지난 17일,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씨가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유제니

지난달 17일, 안드레이 씨가 처음 도착한 곳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였다. 그는 11명의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온누리교회 봉사팀과 함께 난민촌을 방문했다. 안드레이 씨 일행 외에도 한국인들로 구성된 2개의 봉사팀을 폴란드 현지에서 알게 됐다. 그 밖에도 전 세계에서 오는 봉사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고 안드레이 씨는 말했다. 이집트, 스페인, 미국, 영국에서 온 봉사자들이 있었고 특히 멕시코 봉사자를 많이 마주쳤다고 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난 22일을 기준으로 전 세계 각지로 흩어진 우크라이나 난민의 수는 800만 명이 넘는다. 올해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약 4419만 명이다. 우크라이나인 10명 중 4명이 전쟁으로 인해 고국을 떠난 것이다. 우크라이나 난민이 가장 많이 이동한 곳은 폴란드다.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간 우크라이나인은 약 414만 명이다. 폴란드를 거쳐 또 다른 나라로 이동하거나 다시 고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폴란드에 남아 있는 난민이 많다. 대략 118만 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가장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는 폴란드 정부는 올해 27개의 난민 수용시설을 만들었다. 대도시인 바르샤바는 도시 외곽에 있는 타크(PTAK) 엑스포와 중심부에 있는 글로벌 엑스포를 난민촌으로 운영하고 있다. 난민촌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엑스포'(expo)라고도 불리는 이유다. 이런 난민촌의 구조는 대형 쇼핑몰의 형태에 가깝다고 안드레이 씨는 말했다. 각 캠프에는 300~400명의 난민이 수용돼 있었다. 이전에는 더 많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사람이 줄었다. 폴란드 난민촌에 남은 이들은 대부분 아이와 여성이다. 아이가 많은 가정의 가장이거나 장애인이 아닌 우크라이나 남성을 난민촌에서 찾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남성들은 전쟁터에 있다. 

난민촌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잠시 머무는 장소다. 난민들은 폴란드의 다른 도시, 또는 다른 나라로 떠나 직업을 찾는다. 이들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 직업을 주로 구한다고 안드레이 씨는 설명했다. 농장이나 공장이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난민도 적지 않다. 전쟁 발발 4개월이 지난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들어오는 사람보다,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는 사람이 더 많다. 고향에 돌아가진 못하더라도, 최전선에서 떨어진 우크라이나의 안전 지역을 찾아 귀국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안드레이 씨는 “우크라이나 내에 전투 영역이 많이 좁혀진 상태에서 (접전지에서 떨어진) 북부에 위치한 친척 집 등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남겨진 가족을 내버려둘 수 없어 다시 돌아가는 이도 있다.

난민촌은 황금으로 지은 감옥

다행스럽게도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난민촌에서 물자가 부족하진 않다고 안드레이 씨는 말했다. 굶주리는 사람도 없었다. 세계의 수많은 비정부단체(NGO)가 난민촌에 음식과 식수를 비롯한 다양한 물자를 제공하고 있었다. 폴란드 정부도 난민들에게 우호적이다. 폴란드 정부는 우크라이나 사람을 ‘난민’이 아니라 ‘손님’으로 부르고 있다. 전쟁 이전부터 폴란드에는 이미 150만여 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살고 있었다. 폴란드 정부와 시민들이 우크라이나인들을 환대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그렇지만 안드레이 씨는 난민촌을 ‘황금으로 지은 감옥’이라고 했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집과 가족보다 더 절실한 건 없다. 

“영화보다도 더 잔인한 현실을 본 아이들의 심리는 이미 바닥나 있습니다. 난민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거나, 밥을 먹여주는 시스템은 이미 너무 잘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니에요. (난민촌은) 밥도 주고 옷도 주는 감옥입니다. 이 시설은 황금으로 지은 감옥에 불과합니다.”

안드레이 씨는 우크라이나의 노바 카호바카(Nova Kakhovka)에서 온 여성 난민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노바 카호바카는 러시아 군대가 가장 먼저 장악했던 헤르손 주에 있는 지역이다. 그녀는 통곡하며 말했다. “내게 궁궐을 준대도 필요없으니 죽은 남편과 잃어버린 집을 되찾고 싶다.” 안드레이 씨가 기억하는 가장 가슴 아픈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게 되는 일은 난민촌의 일상이었다. 폴란드 정부는 난민들에게 1200기가 용량의 심카드를 무료로 제공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심카드를 꽂은 휴대전화로 고국에 두고 온 가족이나 친척과 연락한다. “난민촌에 있는 사람 다섯 가운데 하나는 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서 휴대전화만 바라본다”고 안드레이 씨는 말했다. 그러다 누군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전화 통화하다 말고 주저앉아 버리는 이들도 많다. 아끼고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비통과 절망을 경험한 난민들이 고국에 돌아간다 해도 그 나라와 도시는 예전의 것이 아니다.

“지금의 세계가 코로나 이전과 절대로 똑같아질 수 없는 것처럼, 우크라이나도 전쟁 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다시는 전과 같은 우크라이나가 될 수 없어요.” 

난민촌에는 ‘사람’이 절실하다

지금 우크라이나 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안드레이 씨는 ‘치유’라고 답했다. 구호 물자는 비교적 풍족하지만, 그 마음을 살필 사람은 부족하다는 것을 난민촌에 가서 알게 됐다.

“상처 입은 난민들에게 난민촌에서의 시간이라도 안전하고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도록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안드레이 씨는 난민촌에서 주로 아이들을 위한 놀이나 교육 활동을 기획했다. 아이들만큼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어머니들이다. 안드레이 씨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좀 있는데 어른들을 위한 것은 별로 없다. 특히 어머니들을 위한 상담이나 음악을 활용한 치유 프로그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국인 봉사팀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 아이들의 모습. ⓒ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한국인 봉사팀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 아이들의 모습. ⓒ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난민촌에 있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모여앉아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난민촌에 있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모여앉아 기념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난민촌에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우크라이나 아이들이 난민촌에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안드레이 씨는 세계로 흩어진 우크라이나 난민 가운데 상당수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봤다. 고국에서 일궜던 삶의 터전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가 세계적인 현상이 됐다는 것이다. 이주한 이들은 새롭게 정착한 사회에 녹아들려고 할텐데, 바로 그들을 위한 장기적인 교육도 절실하다고 안드레이 씨는 말했다. 그 교육을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 역시 이들을 돕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다.

난민을 위한 학교 설립이 목표

안드레이 씨의 기억 속에서 고국 우크라이나는 평화로운 곳이다. 그는 자포리지아에서 자랐다. 아름다운 햇볕을 맞으며 아버지와 함께 강, 밀밭을 거닐던 추억이 있다.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폭격을 맞아 무너졌다. 지금도 매일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그는 듣는다. 

잠시 한국에 돌아왔지만, 안드레이 씨는 오는 8월에 다시 폴란드를 찾을 계획이다. ‘우크라이나 아동을 위한 힐링캠프’를 구상하고 있다. 그에게는 더 큰 계획도 있다. 고려인, 탈북민 등을 위한 한국의 대안학교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한 학교를 폴란드에 설립할 꿈을 갖고 있다. 폴란드의 난민촌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시설이 있고, 난민촌 외곽에 임시 난민학교도 설립돼 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안드레이 씨는 생각한다. 

“우크라이나를 떠난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대략 300만 명에 달합니다. 그들을 위한 교육이 시스템화되어야 합니다. 난민촌에 가면 기껏해야 400명 정도에게 봉사를 할 수 있겠죠. 이렇게 시스템화되지 않은 자원봉사는 임시적이니, 저는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릴 생각입니다.”

폴란드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될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위해 우크라이나의 언어와 문화를 포함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교육싱크탱크인 네스트포넥스트(nest4Next), 그리고 폴란드의 교육단체 등과 함께 난민 학교 설립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2022년 2월 24일(이하 한국 시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각 나라 언론인들은 전쟁 현장에 달려갔다. 실체를 직접 목격해야 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 국내 언론은 외신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몇몇 언론이 한국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 2~3일 정도 현지를 살펴 보도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비뉴스>도 그 현장에 가진 못했다.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직접 접촉하여 그들과 그 가족·친구·동료가 목격한 전쟁을 기록하고 보도한다.

기부 캠페인도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과 ‘휴대전화 뒷번호 8자리’를 송금 메모에 적어, 신한은행 100-034-615484(사단법인 단비)에 기부금을 보내면, 인도적 지원을 위한 특별 모금 활동을 진행 중인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한다. 기부자의 면면과 전달 과정도 보도할 예정이다.

<단비뉴스>는 일련의 보도와 연대 행동을 ‘메르 라솜 – 다함께 평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말로 '메르'(мир, myr)는 '평화', '라솜'(разом, razom)은 '함께'를 뜻한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까지 보도와 행동을 이어가겠다. 연재 기사 및 기부 캠페인과 관련한 제보, 제안, 문의 등은 전자우편 jennsis@naver.com에서 받고 있다. (편집자)

[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연재 보기

① 포탄에 숨진 할머니, 입대하는 아버지

② 폭격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중위

③ 정든 고향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역사 선생님

④ 드론전의 한복판에서 무기 기다리는 장교

⑤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탈출한 고려인 알미라

⑥ 사진가 장진영이 목격한 우크라이나

⑦ 제철소 지하 벙커에서 보낸 65일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