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다문화 가정 일선이가 여고생이 되기까지

 

동남아•중국 출신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이 부쩍 늘어난 것은 90년대 말부터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2세들도 이제 중고등학교에 대거 진학하는 나이가 됐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를 맞은 2세들에게 한국사회는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을까? 그리고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가정의 달(5월)을 앞두고 다문화 가정의 한 여고생을 만나보았다. (편집자)

<완득이>는 여전히 영화 속 얘기

 

▲ 영화 <완득이> 공식 포스터. ⓒ 유비유필름

“가난해서 외국에서 시집 온 어머니 있어 봤어요?”
“그것 때문에 쪽팔렸다는 게 나중에 더 쪽팔릴 거다.”

영화 <완득이> 대사 중 일부다. 킥복싱 선수를 꿈꾸는 완득이는 장애인 아버지와 정신 지체 삼촌과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자기 어머니가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담임선생님에게 듣게 된다. 어머니의 존재는 평범했던 삶에 혼란을 가져 온다. 하지만 결말은 다양성을 인정받고 조화를 꿈꾸면서 행복하게 끝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다문화 시대에 접어든 한국사회의 현실은 여전히 영화와 꽤 거리가 있다. 경기도 구리여고 1학년인 정일선(17)은 필리핀 출신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를 만난 때는 마침 구리시 한 안경가게가 개점 행사로 남자연예인 사인회를 여는 날이었다. 사인회에 늦겠다며 인터뷰를 빨리 끝내 달라는 모습은 우리나라 여느 여고생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일선의 어머니는 20 년 전 한국에 돈을 벌러 왔다가 친구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 곧 결혼했지만 일선이 3년 뒤에 태어난 것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야 할 형편이어서 출산을 늦췄기 때문이다. 태어나서도 2 년간은 필리핀 외가에서 자랐다. 네 살 되던 해 동생이 태어나고 어머니가 직장을 그만두면서 일가족이 함께 살게 됐다.

백일잔치도 돌잔치도 못해 동생 백일 날 처음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어요. 지금은 가족이 모두 함께 살아 좋지만 불편한 점도 있어요. 요즘 들어 아빠랑 같이 있으면 어색하거든요. 사춘긴가 봐요.”

일선은 유치원에 다니며 한글을 처음 배웠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에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학부모회의 때 어머니가 학교를 방문한 뒤 친구들이 피해 다니고 놀아주지 않았다. 그 뒤로는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게 너무 싫었다.

“일부러 가정통신문을 감춘 적도 많아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도 조금은 시선이 무서워요.”

중학교 때부터는 친구 생겨 견딜 만해

일선이 중학교에 입학하자 그나마 이해해주는 친구가 몇 생겨 견딜 만해졌다.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나니 공부가 문제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선행학습을 제대로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여고에 진학했는데,지금은 동성 친구만 있어 좀 갑갑하다고 했다. 

 

▲ 연예인 사인회가 있다며 인터뷰를 재촉하는 일선이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 안형준

한국에서 다문화 가정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 힘들다.사춘기 청소년의 일반적 고민에 ‘정체성’이란 문제가 더해진다. 하지만 일선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이 부분에 대해 어머니는 조금 섭섭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대화를 하며 서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일선은 어머니가 필리핀 출신이라 좋은 점도 있다고 강조했다. 남들은 경험해보지 못하는 타국 문화에 대해 배우고 음식도 자주 해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구리시 다문화가정 지원센터에 ‘나의 가족 이야기’란 주제로 글을 한 편 냈는데 소식지에 실리는 기쁨을 누렸다.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고 한다.

“저 자신이 뿌듯했어요. 주변 분들도 작가를 해보라고 권해요. 솔직하고, 얽매이고 싶지 않은 제 성격이 방송작가로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머니는 다문화 가정을 돕는 자원봉사자가 되길 바란다. 일선은 “같은 환경의 아이들을 도와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일선에게 한국 사회에 대해 바라는 점을 물어봤다.

“다문화 가정이 민폐는 아니잖아요”

 

▲ 일선(왼쪽)과 그의 오랜 친구 임 아무개. ⓒ 안형준

“한국 사람들은 필리핀 사람을 보면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머니랑 같이 시내를 돌아다닐 때 전화가 오면 겁부터 나요. 필리핀어로 전화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거든요. 피해를 주는 것도 없는데 인상을 쓰며 지나가기도 해요. 다문화 가정 아이라고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오히려 그런 배려와 관심이 부담스럽거든요.똑같은 사람이고 능력을 갖고 있는데 차별 하는 건 옳지 않잖아요.”

구리여고에는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해 교류하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교육 대상이 ‘다문화 가정 자녀’로 국한 돼 그 자체가 차별로 느껴진다고 한다. 모든 학생들이 교류의 시간을 갖고 서로에 대해 이해했으면 하는 게 일선의 소망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일선의 친구였던 임(17) 아무개는 “유치원 때는 일선이가 다문화 가정 자녀인 걸 알지 못했다”며 "어머니가 필리핀 분이란 걸 알고 겪어 보니 오히려 다문화 가정이 일반 한국 가정보다 행복해 보였다”고 말했다.

한국의 다문화 가정은 급증하고 있다. 매년 3만 여 쌍이 결혼을 하니 새로 태어나는 2세들도 엄청나게 늘고 있다. 본격적인 다문화 시대를 맞아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다양성을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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